2장. 나무에게 말을 거는 남자

by 강 산

어느 날, 그는 도시락을 꺼내지 않았다.

가방만 들고 와서는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연은 그날따라 책도 펴지 않은 채, 그의 옆 벤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을 시작하길 기다리는 일은 이제 그녀에게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가 오는지, 앉는지, 도시락을 여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어떤 말을 꺼낼지.


그의 손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느렸고, 표정은 무표정하다 못해 굳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말이 잘 안 나오네요.”


목소리는 낮았고, 말끝은 어딘가 흔들렸다.

그가 조용히 숨을 내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는 어머니 제삿날이었어요.”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상하게 그날은 하루 종일 입맛이 없어요.”
“제삿상 차리다가 문득… 어머니가 좋아했던 음식이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걸 기억 못한 게, 너무…”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하듯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그날도 평일이었거든요. 계속 항의 전화를 받다 보니, 점심도 못 먹고 늦게까지 일만 하다 퇴근했어요.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들어갔는데… 식탁 위에 빈 밥상이 있더라고요.”


말의 톤은 차분했지만, 묘하게 건조했다.

그는 정확히 정돈된 문장을 내뱉는 습관이 있었고,

단어를 되풀이하거나 흐트러뜨리는 법이 없었다.


이연은 그때 느꼈다.

그는 아마 매일, 말을 ‘직업’처럼 하는 사람일 거라고.


사람들에게 끝없이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고,

화난 사람을 달래고, 컴퓨터 옆 스크립트를 읽어주는 일.


어쩌면 그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말을 꺼내지만,

정작 ‘자기 말’은 단 한 줄도 말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곤 나무를 바라보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정말 이상하게도요…
갑자기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괜찮다’고.
‘안다고’… 그런 식으로요.”


그 순간, 서울숲 전체가 조용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도, 새소리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그 말 다음엔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조용한 틈 사이로—

그의 오른쪽 벤치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모자를 푹 눌러쓴 중년 여성이었다.

이연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녀가 들고 있던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비닐 안에 국화꽃이 몇 송이 들어 있었다.

하얀색 꽃잎이 조금씩 접히고 있었고, 봉투 가장자리는 축축했다.


여성은 말이 없었다.

다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용히 봉투를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짐을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그날 이후, 이연은 두 눈으로 확인했다.

말이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일 때조차, 누군가에겐 닿을 수 있다는 걸.

특히 그 말이, 누군가에게 도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흘러갔을 때, 더 조용히, 더 깊이 스며든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하루 종일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누군가의 분노를 받아내고,

누군가의 사정을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단 한 명에게만 자신의 이야기를 매일 하고 있었다는 걸.


그 한 명은 사람이 아니었고,

서울숲 한가운데 오래 서 있는 느티나무였다.

그날 밤, 이연은 책 속의 문장을 넘겼다.

그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은, 내가 말한 게 누군가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연은 문장을 한 글자씩 따라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책을 덮었다.


말이란 건 누군가를 향하지 않아도,

닿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충분히 흐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흐름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말은 결국 ‘머무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녀는 가방에 책을 넣었다.

처음으로, 내일의 문장을 기다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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