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는 늘 가르쳐오던 Counseling Practices (상담기본기술) 수업과 함께 집단상담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집단상담이란 보통 8-10명 남짓의 인원이 집단 내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과 치유를 향해 나아가는 상담의 한 종류다. 이 수업을 고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상담에 대한 나의 갈증 때문이었다. 나는 현재 신분 문제로 인해 내가 집적 상담 회기를 진행하지는 않고 있는데, 집단상담 수업을 통해 수업의 일환으로 집단상담 세션을 단 몇 회라도 운영하며 상담의 맛을 보고 싶었달까. 집단은 이전부터 내가 무척 흥미롭게 생각하고 경험해 오던 상담의 형태이기도 했다.
이렇게 수업의 일환으로 집단상담을 활용할 때는 여러 제한점이 있을 수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참여하는 학생들이 서로 일종의 이중관계 (dual relationship) 를 맺게 된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서로 대학원 동기이거나 수업을 함께 듣는 교우 관계이면서, 수업의 일부인 집단상담에 참여할 때는 집단의 구성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참여하고 하물며 집단 구성원들이 같은 대학원 프로그램의 학생들이면 서로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기 쉬울 리가 없다. 상담의 기본인 비밀보장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아닌가.
학기 초 3주까지는 내가 집단을 이끌고 그다음부터는 학생들이 돌아가며 집단을 진행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나로서는 학생들에게 바통을 넘기기 전에 어느 정도라도 집단 내에 심리적 안전감을 심어둬야 했다. 학생들이 내면의 온갖 상처를 다 꺼내진 않더라도 (집단과 수업의 경계에 있는 이 환경에서 그걸 제대로 봉합할 수도 없으니 그래서도 안될 노릇이다), 최소한 주제를 따라 진솔한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어느 정도 응집된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 날의 주제는 집단상담 내에서의 '다문화주의'였다. 나는 Social Identity Wheel (사회적 자아 바퀴?) 이라는 핸드아웃을 활용해 학생들이 자신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의 범주를 탐색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정체성의 범주란 인종, 성별, 젠더, 성적 지향, 장애 유무, 나이, 국적, 모국어, 사회경제적 지위, 종교관 등을 포함한다.
사실 나야 집단의 리더로서 이런 활동을 촉진하고 구조를 제공하면 될 뿐 참여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자칫하면 참여가 아주 저조해질 수 있는 이 모호한 집단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는 나를 드러내기로 결심한 터였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질문지의 질문에 답을 했다. 이 중 내가 가장 자주 생각하는, 또는 가장 생각하지 않는 정체성은 무엇인지, 내가 더욱 배우고 싶은 내 정체성의 범주는 무엇인지 등.
"내가 가장 자주 생각하는 정체성 범주는 무엇입니까?"
집단의 리더이자 참여자로서 나 역시 질문에 대한 답을 골몰하게 생각한 결과, 이에 대한 나의 답은 다름 아닌 '언어'였다. 변변찮은 영어실력으로 유학을 나와 어떻게 학위를 마무리하고 연구자 그리고 교수자의 역할을 해오고 있지만, 언어란 단지 그것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녔다. 학과 회의에서, 학생들과의 질의응답에서,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논문을 읽고 또 쓰는 과정에서. 즉 일터에서 보내는 내 하루 일과 대부분 동안, 나는 수도 없이 '언어'의 격차가 나의 본모습을 가리거나 내 실력이 과소평가되도록 만들지는 않을지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담하면서도 진솔하게 이런 나의 이야기를 전했다. 나와 10명의 학생, 그렇게 11명이 채운 교실 내에서 영어를 제2 외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중 나뿐이었다. 나중에 다 들어보니 무려 3-4명의 학생은 가장 생각하지 않는 정체성으로 '언어'를 꼽았었다. 자신들이 가장 생각하지도 않고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그들의 '모국어' 영어가,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는 매 순간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정체성의 범주을 알게 된 그 몇몇의 얼굴에 신기함과 놀라움이 담겼다. 어쩌면 강점이 아닌 약점에 해당하는 부분을 교수자가 나서서 얘기하는 것을 보고 '아, 이곳은 내 모습을 좀 더 안전하게 드러내도 되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한 이도 분명 있었다.
계획대로군. 좋아. 그쯤 해두고 넘어가려는 찰나, 한 학생이 말을 건넸다.
"그럼 혹시 교수님의 모국어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엇, 이건 나도 생각하지 못한 전개였다. 한국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국어를 말하라고? 그래본 적도 없었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이야기를 꺼낸 그는 나이도 꽤 지긋한 퇴역군인 출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앞서 스스로가 매우 내향적이라고 얘기할 만큼 수업에서도, 집단에서도 과묵한 존재였다. 그런 그가 오랜만의 침묵을 깨고 한 이야기는 바로 나의 모국어를 듣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밖에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다른 언어를 들을 때마다 참 경이롭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요. 한국어는 살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교수님만 괜찮다면 무슨 말이든 들어보고 싶네요."
집단상담에서의 집단은 흔히 '실험실'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집단상담이라는 시공간이 일상생활에서 잘하지 않는 새로운 행동과 상호작용을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한국말을 마음껏 말해보는 경험. 나는 교수자로서, 집단의 리더로서, 모두의 앞에서 이 실험을 진행할지 결정해야 했다.
까짓 거 뭐, 하지. 정말 해본 적 없는 일이라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또, 이 정도까지 내가 한다면 집단에 참여하는 학생들 상당수가 마음을 열고 집단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상 하려니 너무 어색하기도 하고 조금 긴장도 되어서 웃으며 양해를 구하고 잠깐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런 모습들조차 다수의 학생들에겐 진귀한 구경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 역시 수업 내에서 심리적 안전감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 교수자도 저렇게 어색해하고 긴장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곤 자신이 느끼는 긴장감도 정상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곤 칠판에 적혀 있던, 조금 전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영어로 쓰인 집단의 목표를 천천히 한국말로 번역하여 읽어나갔다.
"우리는 이 집단에서... 서로의 성장과 안녕감을 도모하고... (후략)"
1분도 채 되지 않았을 그 시간이 어찌나 길었는지. 말을 하면서도 몸이 배배 꼬일 것만 같은 느낌, 그건 긴장이라기보다는 어색함에 가까웠고, 어색함보다는 또 생경함에 가까웠다. 정말 이런 경험은 나도 지금껏 살며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토록 익숙한 강의실이라는 공간에서도 여전히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있었구나.
나의 한국어 발언이 끝나고 난 뒤, 학생들은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몇몇 학생들은 무난하지만 긍정적으로 나의 한국어 시범(?)에 감사하는 코멘트를 해주었다. 그로부터 1-2주 후, 지금까지의 집단상담 경험을 성찰해 보고 느낀 점을 적어서 제출하는 과제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이 우리 수업의 집단이 응집력을 가지게 된 계기로 이 날 나의 한국어 시범을 꼽아주었다. 집단의 리더로서 본의 아니게 좀 나댄 것은 부인할 수 없겠으나, 실험은 나름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이 날의 경험은 내게도 배움을 주었다.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가 모국어라는 사실은 이민자로 살아가는 내게 일종의 핸디캡과도 같은 것이었다. 립서비스처럼, 그래도 나는 한국어라는 다른 언어도 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사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한국어로 스피치를 해보고 박수와 격려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이 날 이후 내 영어가 갑자기 늘었을리도 없건만 영어를 구사하는 내 마음이 조금 더 편하게 느껴지는 건, 이젠내가 "언어"라는 정체성을 왠지 조금은 덜 생각하며 지내는 것 같은 건,단지 기분만은 아닌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