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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산 박규선 Mar 22. 2024

<사주디자인> 고뇌하는 그대에게

출처: <사주디자인>

고뇌하는 그대에게          


왜 사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현학적이고 유희적인 언어로 포장된 술수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근원에 대한 질문보다는 포장된 모습에 열광합니다. 개념정리가 되지 않은 채 클릭을 유도하는 언어유희 방식의 강의가 난무합니다. 전체를 조망하고 통찰하기보다는 국부적인 문자 해석에 함몰되어 혹세무민하는 말들이 강물처럼 세상을 흘러 다닙니다.


사주팔자(四柱八字)는 음양과 오행이 상호작용을 통하여 펼쳐낸 인사(人事)를 표상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양자 물리학적 영역에서 사물을 만드는 기본 요소인 양자장(氣)이 보이는 세계인 현실영역에서 정의되고 문자로 범주화된 것이 천간입니다. 천간(天干)은 사물의 근원에서 작용하는 음양(陰陽)이 시각적으로 문자화된 것이죠. 상(象)으로 표상된 것이 주역의 팔괘(八卦)이고, 문자화된 것이 사주팔자를 구성하는 간지(干支)입니다. 주역과 사주명리학은 서로 상호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역을 알면 사주명리학의 지평을 크게 넓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 혼자인 것 같지만, 만물의 근원에서는 음양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의존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음양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만물도 역시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며 중화를 통해 새로움을 창조해내고 있죠. 음은 양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양 역시 음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유형의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는 홀로 인 것 같지만, 무형의 세계에서는 파동으로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이 동체이면(同體裏面)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동일체입니다. 노자는 이를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은 우주를 ‘분리된 대상’들의 집합체가 아닌 상호연결된 관계성의 네트워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 속의 모든 대상은 단일한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형상에 지나지 않으며, 장재(張載)는 이를 ‘기(氣)의 일시적인 취산(聚散) 활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aladin.kr/p/1qGtd

장재(張載)에 따르면, 기(氣)는 단지 모이고 흩어짐이 있을 뿐이며 생겨나거나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장재에게 있어 생(生)과 사(死)는 기의 취산(聚散) 활동의 유형으로서, 형질(形質)이란 물에서 얼음이 뭉쳤다가 흩어지는 일시적인 형태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태허(太虛)를 이루고 있는 기는 물질적이며, 사물이란 단지 기의 취산 활동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일시적인 형태, 즉 객형(客形)이라는 것이죠.


사물이란 기가 잠시 응취되어 있는 일시적 형태이므로 이를 잠시 왔다 가는 손님으로 비유하여 장재는 이를 객형이라 하였습니다. 기는 흩어지더라도 태허라는 기의 원질(原質)은 보존되는 것이며 허무(虛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기의 세계는 증감 없이 영구하다는 유물론적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기의 취산(聚散)은 태허에서 비롯되는데,

 얼음이 물에서 얼었다 녹는 것과 같으며,

태허가 기라는 것을 알면 무(無)라는 것은 없다.     


기가 응취하면 형태를 이루고, 흩어지면 기의 상태인 태허로 돌아갈 뿐입니다. 기는 형체가 없으나 무형의 상(象)이 있는 것이므로 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절대 없음, 즉 허무(虛無)는 아닌 것이죠. 단지 드러나지 않음[幽유]과 드러남[明명]의 구별이 있을 뿐 유무(有無)의 구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텅 빈 태허가 보이지 않는 氣라는 사실을 안다면 결국 無라는 것은 없다 하는 것이죠.


장재는 무형(無形)의 상(象)을 유(幽)로, 유형(有形)의 형(形)을 명(明)으로 변별하여 ‘무(無)는 없다(無無)’라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유는 무에서 비롯되며(有生於無유생어무), 천지 만물은 무를 근본으로 한다(天地萬物以無爲本천지만물이무위본)”라는 왕필(王弼)의 노장현학(老壯玄學)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양자장(量子場)은 근본적인 물리적 실체, 즉 공간 어디에나 존재하는 연속적인 매체로 여겨진다. 소립자들은 단지 그 장(場)의 국부적인 응결에 불과하다. 에너지의 집결로서 그것들은 왔다가 가 버림으로써 개체의 특성이 상실되고 바닥의 장으로 융합된다.      


사물의 형성에 대한 동양 철학적 개념의 기(氣)와 양자 물리학적 개념인 장(場)의 설명은 서로 유사합니다. “양자장에서와 같이 場-또는 氣-은 모든 물체의 기초가 되는 본질일 뿐만 아니라 파동의 형태로서 상호작용을 수행합니다.


” 물이 얼면 유형의 실체가 되고, 녹으면 다시 본원인 물로 돌아가는 것은 기의 바다인 태허에서 기의 취산에 따라 사물이 일시적인 형태를 갖추었다가 다시 태허로 돌아가는 것과 이치가 같죠. 이것은 우주 어디에나 존재하는 연속적인 매체로서의 양자장이 에너지의 국부적인 응결로 사물이라는 일시적인 실체를 이루었다가 다시 장의 바다로 융해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사물이란 ‘변화의 일시적인 형태’로서 ‘객형(客形)’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얼음이라는 개체가 녹으면 개체의 특성이 사라지고 형체가 없는 물로 돌아가듯이, 국부적인 에너지의 응결체인 소립자가 분해되면 개체의 특성이 사라지고 형체가 없는 무형의 에너지장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정신을 품고 있는 천부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同本

일묘연만왕만래용변부동본     


하나(一)가 시작하여 묘리(妙理)를 한없이 펼쳐내니

삼라만상이 가고 오며 무수히 쓰임을 달리하지만

본(本)이 되는 하나(一)는 변함이 없다.     


http://aladin.kr/p/SqGD6

천지인 만물은 생장수장(生長收藏)의 이치로써 끝없이 순환하며 天과 地, 理와 氣, 有形과 無形, 陽과 陰, 낮과 밤이 서로 고리(環환)를 이루며 하나(圓원)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一)는 묘리(妙理)로써 만물만상(萬物萬象)을 펼쳐내며, 가고 오고 한없이 순환하지만 본디 하나(一)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는 거죠.      


‘루프 양자 중력이론(Loop Quantum Gravity)’은 수학적 형식으로 이러한 공간 원자와 원자들 간의 진화를 정의하는 방정식을 설명합니다. ‘루프(loop)’, 즉 ‘고리(環)’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든 원자가 고립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비슷한 것들과 고리로 연결되어 공간의 흐름을 이어주는 관계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와 서로를 연결하는 원리인 환(環)은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그물 같은 관계망으로 구성하여 사물 간의 상호작용, 상호의존, 상호관계를 형성하는 공존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물 개체는 독존(獨存)이 아니라 관계망 속에서 상호연결되어 타자(他者)를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서로 의존하며,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보장받고 있죠. 상대와의 공존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는 것입니다.


만물은 ‘독존(獨存)’이 아니라 우주적 연결망 속에서 전일성(全一性)으로 공존하며, 이는 타자를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 인정하여 상호의존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본서는 천인지(天人地)가 서로 고리(環)를 이루어 공존하는 상호관계성의 시스템을 ‘환존(環存)’이라 정의합니다.


    사주팔자는 일간(나)을 기준으로 나머지 간지와 상호작용을 통하여 ‘나’라고 하는 독특한 존재를 표현해냅니다. 일간(日干) 혼자서는 ‘나’라고 하는 복잡다단한 존재를 모두 표현할 수는 없겠죠. 마찬가지로 사주 여덟 글자로 정의된 ‘나’는 또 다른 사주팔자와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라고 하는 독특한 존재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우리’를 만나 독특한 ‘공동체’를 창조해내죠.


주역은 이것을 “보합대화(保合大和)”라는 멋진 어휘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주희(朱熹)는 대화(大和)란 음양이 모인 충화지기(沖和之氣)이며, 보합(保合)이란 이미 생겨난 중화지기(中和之氣)를 온전하게 보전하는 것이라 주석하고 있습니다. 대화(大和)는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내는 균형과 조화의 최고단계로서 수많은 중화 중화가 모여 상호작용을 통해 최고의 가치로써 지향하는 목적지점이라고 할 수 있죠.


음양의 상호작용은 대립과 대대를 통해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며 중화를 지향합니다. 중화는 음양의 미묘한 차이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접점을 의미하며, 이것은 중화와 중화가 모여 더 큰 중화를 이루며 전일성(全一性)을 이루는 우주적 대조화(大調和)를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기 사물의 개체 변화는 부분적으로 불균형을 야기할지 몰라도 우주 총체적으로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근원적으로는 음양의 합을 이루고 있는 태극처럼 안정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역은 이것을 “천하의 모든 변화는 항상 하나로 귀일(歸一)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한구석 지구라는 별의 한 모퉁이에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공간을 가득 채운 별들을 바라보며 인간은 존재에 대한 까닭을 끊임없이 궁구해왔습니다. 하늘과 땅은 무엇이며 나는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탐구는 호기심 많은 이성적 인간으로서 마땅히 품을 수 있는 의심이고 또한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하는 물음에 대해서 그가 들었던 대답이라고 농담조로 보고한다.


“깊은 신비를 조사하려는 너 같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     


에덴동산의 우화는 인간의 호기심을 원천적인 원죄의 틀에 씌워 단죄함으로써 인간의 지적 탐구를 무지의 울타리에 가두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무지가 곧 선이 되고 지혜가 악이 되는 논리는 인간의 의식을 예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죠. 카를로 로벨리는 “무지에 만족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무한이라 부르면서 앎을 다른 곳에 위임해버리는 사람처럼 무지한 사람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은 보이지 않는 극미의 영역으로 들어가 우주 만물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과학이 삶과 죽음, 인간의 존재 목적을 밝혀줄 날이 올까요?


주역이나 사주명리학은 아직 과학이 밝혀내지 못하는 인간의 신비로운 삶의 파노라마, 그리고 과학과 종교의 영역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답을 주지 못하는 생로병사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 삶의 이치를 설명해주고 있죠. 과학과 철학은 동체이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게 철학인지 종교인지 과학인지 아리송할 때가 많습니다. 양자물리학은 동양 철학적 용어를 빌려 설명하지 않으면 3차원적 세계관의 과학적 언어로만 설명하기는 뭔가가 부족하죠.


주역이나 사주명리학을 단순히 술법이나 술수로 취급하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나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동양철학의 샘물인 주역과 양자물리학의 접점을 모색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죠. 학문적으로 곧 조우할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우주를 생성하는 근원인 음양(陰陽)과 지구의 사시 순환을 표상한 오행(五行), 그리고 이것을 상(象)으로 표현한 주역, 문자로 표현한 간지(干支), 나의 좌표인 사주팔자(四柱八字)를 통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주체적으로 존재를 탐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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