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ㄱ'도 모르지만 그림을 그린다.

어깨너머여서 좋은 일

by 지수연

나는 완벽한 야행성 인간이다. 직업 특성상 점심시간에 출근을 하고 밤늦게 일이 끝나는 데다 직장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꽤 되다 보니 늘 자정이 넘어야 진짜 휴식에 들어간다. 나에게 밤 열 두시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는 아주 사적인 시간이다. 이 차분하고 개인적인 시간에 나는 시시콜콜한 글을 쓰기도, 캘리그래피라고 부르는 손글씨를 연습하기도, 그림책을 보며 수채화를 따라 그리기도 한다. (뜨개질을 하거나 자수를 놓거나 팔찌를 만들 때도 있다. '무엇을' 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간혹 엄청난 책을 만난 날에는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글자 속으로 빠져들다가 난시 축이 10도쯤 더 돌아가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 몰입감이 주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친구 효정양의 생일 엽서.
절친 기쁨양이 좋아하는 오은 시인의 글.


물론 손글씨도 그림 그리기도 잘하지 못한다. 내 전공은 음악이고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취미에 대한 어떤 것도 배워본 일이 없으니 당연히 전문가처럼 해낼 수는 없지만, 그냥 못하면 못하는 대로 열심히 그리고 열심히 쓴다. (가끔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도 한다. 인스타 유저들은 너그러운 이들이 많아 요상한 그림을 올려도 후하게 하트를 눌러주곤 하니까.)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이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이다. 어떠한 직업을 갖고 사회와 인간에게 무언가를 기여하여 돈을 받는 위치가 되면, 그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그 일을 '잘 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그냥 하면 되는 일'이나 '즐겨도 되는 일'이 아니라 '잘해야만 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같은 것이지 않는가. 즐거움은 어깨너머의 위치에 있을 때 가장 쉽게 얻을 수 있고, '밥벌이'라는 단어가 붙기 시작하면 그저 전부 고달플 뿐이라는 씁쓸한 명제. 누군가 돈도 안 되는 일을 뭘 그리 열심히 하냐 물으면 나는 이 밥벌이론을 설명해 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지극히 사적인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니까.


발그림을 그려도 좋고 퍼즐을 맞춰도 좋고 내일 아침이면 ATM 명세표 분쇄기에 갈아버리고 싶어 질 감성 터지는 시를 써도 좋으니 무엇으로든 자신을 표현해 보기를 나는 꼭 권하고 싶다. 그림의 ㄱ자도 모르는 나도 무작정 그리다 보니 조금은 늘었다는 소박한 격려도 덧붙여서.


얻어걸려서 조금 잘 써진 캘리그라피 - 세밀 붓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