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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라리스의 바다 Jan 17. 2024

나의 일본은 무엇이었을까?

현대 일본의 청춘영화 몇 편에 대한 단상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이시이 유야, 2017)라는 영화를 봤을 때만 해도, 부유하는 청춘과 답답한 현실이 절묘하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했다. 


스타일면에서는 <중경삼림>(왕가위, 1994)과 비슷했지만, 내용적으로는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떠올랐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무기력한 청년들의 풍경을 그린 점이 비슷했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강력한 내러티브 없이 분위기만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하지만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미야케 쇼, 2018)를 봤을 때,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이하 <도쿄의...>) 같은 콘셉트가 너무 편리하게 작동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도쿄의...>와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이었다. 일용직 혹은 알바를 하는 젊은이들, 뿌리 없는 사랑, 술과 담배, 그리고 방황, 함께하는 가족은 없음. 뚜렷한 내러티브 없이, 감성이 에피소드 사이를 채우고 있다. 


방황하는 청춘은 어디든 있었다. 영화는 그런 청춘을 근사하게 그린다. 아니 영화만큼 포장해 주는 장르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유 없는 방황>부터 지금까지. 청춘은 방황의 자유를 만끽했고 기성세대는 그것을 용인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은 그런 청춘을 동경하면서 자랐다. 


하지만 <너의 새...>와 <도쿄의...>를 연달아 보면서 청춘을 유예하는 대신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청년을, 나아가 무기력에 빠진 일본 사회의 내면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어쩌면 한국 관객의 입장,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영화를 억측한 것일 수도 있다.

정말로 그들은 무기력한 건가? 


옛날부터 무기력한 청춘을 그린 일본 소설과 영화는 많았다. 앞서 언급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도 청년들은 무기력했다. 그건 세계 제2차 대전에서 패배하고 미국에 굴복한 일본 기성세대와 미국에 대한 무기력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든지 『상실의 시대』같은 소설에서도 무기력한 청춘이 등장한다. 그들은 전공투 세대의 학생운동이 몰락하면서 심한 무력감을 느낀다. 이들의 소설에서는 밟힌 청춘이 느끼는 굴욕과 외로움이 드러난다. 나는 그런 점들이 좋았고.


하지만  <너의 새...>와 <도쿄의...>과 같은 영화에서 느끼는 건, 핑계가 생긴 자조 같은 것이다. 우리는 청춘이니까 어차피 사람들이 다 이해해 줄 테니,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안전한 이유가 생긴 것 같다. (사실 이런 생각은 위험하고도 조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최근의 일본 영화를 보면서 무력감에 빠진 일본 사회가 다른 세계(타임슬립) 쪽으로 눈을 돌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다. 이 세계에서는 어려우니까 다른 세계로 가자, 그곳에 숨자, 같은 생각 말이다. 


크라카우어가 말했듯이 영화는 시대의 공기니까, 당연하게도 영화 속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그 당시의 시대성이 담겨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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