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를 잔인하게 만드는 것은 어른들의 상상력
***** 미성년자분들은 가급적 읽지 마시길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
아기 상어 뚜루룻뚜룻
한 때 전 세계를 집어삼켰던 노래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흥얼거리던 신나고 귀여운 노래다.
유튜브 음원 순위 1위를 찍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 인기를 누렸던 노래가 한 때 논쟁이 된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유해한 노래를 들려주는 거 같아요. 금지시켜 주세요."
중요 쟁점은 이 부분이었다.
유해하다.
어린아이들에게 상어같이 포식자를 친근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미 너무 지나치게 어른인 내 입장에서는 쉽게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었으니까.
바다의 사냥꾼인 상어이야기는 어린아이에게 유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인가.
유익한 것만 보고 배웠다면 그 아이는 건강하고 착한 아이로만 자라나는 것인가.
반대로 상어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배운 아이들은 폭력적이고 남을 해하는 어른으로 자라는 것인가.
끊임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연의 본질은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자연은 아무런 의지를 지니지 않는다,라는 것이 자연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설명이라고 본다.
상어가 물고기를 포함한 해양 생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폭력적이거나 악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을 악하고 폭력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미디어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악랄한 목소리들이다.
"바닷속 포식자인 상어는 작고 가여운 물개들을 산 채로 뜯어먹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로 한 입씩 베어 먹습니다. 물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잡아먹히고 맙니다."
이게 자연스럽게 들리는 사람들은 내레이터의 잔혹함에 그저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끔찍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여기부터는 불편한 사람들은 안 봤으면 한다.
다만 나는 저 내레이터의 말처럼 인간의 행위를 그대로 묘사하고 싶다.
상어가 잔인한지, 인간이 잔인한지를 같은 방식의 표현으로 해 보자.
"인간은 돼지를 콘크리트 사육 우리에서 키웁니다. 지능이 높은 돼지는 좁고 더러운 우리가 불편하지만 그들에겐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배설물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공간이 없습니다. 흙목욕을 즐기는 그들은 평생 동안 흙을 밟아보지 못합니다. 맛이 없고 퍽퍽한 사료지만 살기 위해서 열심히 먹습니다. 그들에겐 생존의 영양소이자 그들 삶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갑니다. 수백 마리의 돼지가 움직일 틈조차 없이 빽빽하게 트럭 뒤에 실립니다. 움직이면 다쳐서 상품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더 많이 싣습니다. 그렇게 도살장으로 끌려간 돼지는 기계에 끼여서, 차가운 톱날에 몸이 두 동강으로 갈립니다. 죽은 돼지는 다시 작은 조각들로 썰립니다. 부위부위 토막 난 돼지들은 스티로폼 그릇에 담겨 비닐로 포장이 됩니다. 그리고 정육점에 전시가 됩니다. 사람들은 웃으며 조각난 돼지들을 구매합니다."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지만..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자연과 인간은 참 달라 보인다.
실제로 다른 부분도 있고 의외로 같은 부분도 있다.
적어도 먹고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인간은 자연의 큰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필요 이상의 짓을 많이 한다는 점에서 자연과 많이 다르다.
배가 부른 상어는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다.
천천히 유영하는 상어와 그 주위에서 그저 상어를 슬쩍 피하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도망가지 않는 작은 물고기들의 움직임은 대자연의 위대함 그 자체라고 보인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충분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불필요한 행위를 반복한다.
그래서 과도한 살생, 과도한 산림 파괴, 과도한 개발이 이어진다.
거기에다가 아주 멋들어진 말을 덧 붙인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인간답다는 말은 잔인하다.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인간이 싫어할만한 부분에서는 눈을 가려버린다.
불편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은 언제나 본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모습이다.
본인이 아름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왜 아름다운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죄를 전부 다 덮어버렸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변의 환경에 죄를 짓는 것이 많다.
그것을 알수록 우리는 반성할 수 있고 낭비를 줄일 수 있고 죄를 덜 수 있다.
아름답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추악한 존재임을 알고 그 추악함을 줄이려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