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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13. 2021

별일 없이 우리는 특별하다

스티븐 크보스키, 원더

WONDER, 2017, 미국, 113분




 이 영화는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 부은 헐리웃 대작들 사이에서 개봉한 영화다. 나는 <원더>에 '꿋꿋하다' 라는 형용사를 사용하고 싶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꿋꿋함에 대해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원더는 꿋꿋하게 하고픈 말을 명확히 하고 있는, 그 자체로 온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볼 때 필요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서사인가?'라는 질문은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질문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문제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그 문제를 바라보고 사고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미흡할 지라도 응원하게 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원더>는 미흡함에도 응원하게 되는 영화가 아니라, 이미 어떤 이들을 응원하고 위로하고 있는 충분한 영화였다는 것이다.


 어기는 사랑스럽고 영리한 우리의 주인공이다. 어기는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라는 것은 결국 다수가 지배하는, 소수를 착쥐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어기에게 외모가 콤플렉스로 다가오는 것은 어기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에서 비롯되었다. 몹시 사랑스럽고 재주가 많은 아이지만, 헬멧 속을 안식처 삼아 숨곤 한다. 넘치는 사랑과 관심을 주는 가족들 앞에서도 헬멧을 쓰고 입을 다문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관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할 땐, 어째서 그런 관대함을 바라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기는 자신과 가족들도 결국 같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며 본인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게 됐을 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들이 시선을 주고, 함부로 어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이들은 조롱을 하거나 아기는 어기를 보고 울음을 터트린다. 어기에게 세상이란 지극히 잔혹한 현실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기는 우주로 가는 것을 꿈꾼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과 자신이 처한 시선들에 대한 탈피를 꿈꾸는 것이기도 하다. 광활하고 신비로우며 모든 것이 다르고 특별해서 그 다름이 인정되는 세상은 어쩌면 우주일 지도 모른다.  또는 그곳에선 모두가 헬멧을 써야 한다. 우주에서 산소는 좁은 헬멧 안에 존재한다. 어기가 지구에서 느끼고 있는 무중력과 갑갑함이 그것과 명확히 다르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영화는 홈스쿨링을 하던 어기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겪는 일을 이야기한다. 중심 이야기는 어기이지만, 어기의 주변인물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다루어 다양한 관점을 확보하고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에서도 다양한 관점이 삽입되어 있다. 때문에 이 영화가 좋다. 만약 이 영화가 '어기는 그저 다른 것뿐'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어기만의 이야기와 어기가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이겨 나가는지만 다루었다면, 어쩌면 그 다름을 강조하다 도리어 차별을 만드는 영화가 됐을 것이다.

 다름이라는 말은 절대 위로가 될 수 없다. 사실 소수자이자 약자를 다루는 영화에서 많이들 '다름'을 강요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문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르다'는 말은 '같지 않다'는 말이기도 해서, 그들을 분리하는 것에 힘을 실어주곤 한다. 나는 그 다름이라는 워딩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름의 강조나 언급 없이 자연스러운 공동체의 일원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원더>는 아주 뛰어나고 섬세하게 그것을 이룬다.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며 모두에게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각자의 특별함이 존재하며 우리는 같고 동시에 다르며, 우리는 공동체일 수도 개인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움은 큰 힘이 된다.


 어기의 학교생활은 생각대로 쉽지 않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학교가 어기에게는 더 어렵고 고된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공간이 된다. 어기를 괴롭히는 아이들과 어기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 어떤 것이든 쉽지 않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어기는 주인공이기에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심리는 몹시 당연하다.

 주인공이 있다면 무대 뒤편이 존재한다. 비아는 어기의 누나로 언제나 부모와 관심을 어기에게 양보해야 했고, 이해와 배려와 인내는 비아의 몫이었다. 혼자서 무엇이든 해결하고 해내야만 했다. 그런 비아를 위로해주는 두 명은 할머니와 단짝친구였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모든 부분을 공유했던 하나 뿐인 친구는 갑자기 데면데면하다. 역시 비아에게도 학교가 쉽지 않다. 비아에게도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비아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그래서 서로를 오해하게 되고 끝내 이해하게 된다. 이해란 결국 오해로 가는 길이기도 해서 오해로 끝나거나 다시 이해로 나아갈 수도 있다. 행동이 중요하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관계는 언제고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 행동은 '나'를 달라지게 하는 힘이 있다. 꼭 과한 제스처일 필요는 없다.


 어기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오로지 어기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어기의 가족들도 조금씩 자신을 확보하게 된다. 멈췄던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서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확인한다. 강하게 밀착되어 서로를 끌어안고 있어야만 했던 시간을 지나 각자의 영역을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본인들의 문제를 극복한다. 문제를 직면하고 말을 하고 혹은 들으며 시간은 그렇게 흐르는 듯도 하다.


<원더>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영화이다.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영화는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다. 짓궂고 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그려내지만, 절대 그 아이들에게서 악함을 연출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의 부모님을 조명해준다. 어른들의 언어가 가지는 힘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끝내 미안하다는 말로 방을 나선다. 어떤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될 지는 물론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어른들이 어른들의 행동에 대해 비판의 눈초리와 몸짓을 해주어서 좋았다. 그것은 절대 옳은 행동이 아님을 강조한다. 비굴함이 없다. 배려 넘치는 어른들이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관객들에게 건네준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잘 해결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고민을 절대 쉽게 놓지 않는다. <원더>가 우리가 이제껏 봐왔던 수많은 영화와 다를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어쩌면 좋은 어른이 되는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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