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라는 장소

by 구경하
글쓰기는 진정한 나만의 장소다.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기자는 글쓰기를 일로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장래희망이 기자였습니다. 중간에 한눈을 판 적도 없죠. 하지만 기자라도 직업적 글쓰기가 아니면 글을 시작할 동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저명한 작가의 경우에도 개인사를 다룬 에세이는 별책부록과 같습니다. 자전적인 글은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작품 해석을 위해 참고하는 보충 자료일 뿐입니다. 소설가 김영하는 자전적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에서 ‘이런 종류의 글은 일생에서 한 번만 쓸 수 있다’고 하기도 했죠. 그래서 본책 없는 별책부록 같은 글을 브런치에 올리는 건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석 달간 개인적인 글을 써봤습니다. 제게 쌓인 기억의 조각을 모아 한번쯤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기억이 사라지고 감각이 무뎌지기 전에 말입니다. 자라고 성장하며 경험하고 공부했던 것들, 그 과정에서 스쳐간 감정의 단편들을 이렇게나마 일단 그러모아 두겠습니다. 인생의 절반쯤 살아보니 이제 무슨 일이 닥쳐도 놀랍지 않다는 걸 알게 되어서라고, 부족한 글을 남겨둔 이유를 적어봅니다.


직업을 이유로 자제해 왔지만, 사실 자기 삶에 대한 글쓰기는 인간에게 본능 같은 근원적 욕망입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서 인간을 ‘서사적 동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파편화된 과거 사건들에 맥락을 부여하고 현재로 연결시켜 나가는 서사적 실천을 거쳐 인간은 자기 존재를 형성한다는 겁니다. 기억을 이야기로 구성하고 이야기가 다시 기억을 끌어올리는 순환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역사성을 만들고 미래를 향해 모험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서사는 일기 같은 사사로운 기록이 아닙니다. 아니 에르노가 말했듯, 글쓰기는 언제나 사회적 개입입니다. 무언가에 대해 쓰는 것은 세상과 연결되는 일이며, 그것을 세상에 남기겠다는 결심입니다. 또, 과거를 순서대로 나열해서 쓴 것이 그대로 이야기가 되지도 않습니다. 글쓰기는 새로운 인식에 이르기 위한 주체적인 활동이고, 지난 경험에 대한 평가를 전제로 합니다. 어떤 기억은 현재와 이어지고 미래의 관계를 만들어내지만 반대로 의미 없는 경험은 과거에 남게 됩니다.


그런데 한병철에 따르면, 이렇게 자기 삶에 몰입해 기억을 성찰적으로 다루는 능력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길러집니다. 효율과 성과의 논리가 압도하는 현실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진정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도구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경청해 주는 상대가 필요합니다. 어떤 질문을 하지 않더라도 그저 앞에 앉아 상대를 응시하며 무언의 격려를 전하는 사려 깊은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에겐 이야기할 영감이 떠오르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친밀함과 신뢰를 나누며 경청하는 관계는 갈수록 희소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만 할 수 있습니다. 생성형 AI는 입력된 데이터만을 분석할 뿐, 말로 표현하지 않은 감정을 언어화하거나 침묵과 표정, 시선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감정을 언어로 정리할 때까지 성찰하는 시간을 기다려줄 수도 없죠. 인공지능은 과거의 패턴이 이어질 것을 전제로 추론할 뿐 인생관을 전환하는 실존적인 결단을 고려하지 못합니다. 비록 생성형 AI가 글을 쓰고 읽고 댓글을 달고 하트까지 대신 눌러주는 세상이 되고 있지만, 인간의 성숙은 다른 인간과의 교감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머금고 있던 이야기를 두려움 없이 꺼내놓을 수 있게, 제가 기댈 수 있는 독자가 되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답을 찾기보다는 질문을 이어가는 글을 견디어 주신 분들 덕분에 저는 글쓰기라는 또 하나의 장소를 품어 봅니다. 자기 서사와 마찬가지로, 장소들 또한 과거와 현재가 만나 서로를 구원합니다. 지난 경험과 관계, 기억이 재구성되며 오늘 그곳의 의미가 되죠. 그 기억의 조각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살아가다가, 다시 기억의 무게가 느껴지면 내려놓으러 들르겠습니다. 그런 결심을 하기에 좋은, 내일은 새해입니다.


모두 새해에 안녕하시길 빕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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