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인문학(The 인문학)이란?
대체 인문학은 어떤 학문일까요? 어떤 학문이기에 인문학이 절대 빠지면 안 된다고 말을 할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인문학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인문학이 ‘인간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는 말은 정상인 것 같습니다. 인간을 연구해야 한다는 건, 결국 인간인 나를 먼저 연구해야 가능한 것이지요. 나를 연구한다는 건 나에 대하여 깊이 탐색을 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깊이 탐색하려면 나에게서 답을 얻어내어야 하니까 나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는 뜻이고요.
칸트의 이 세 가지 질문들이 나를 깊이 탐색하고자 하는 인문학 질문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행동하고 있는가?
셋째, 나는 지금 무엇을 희망으로 삼고 사는가?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나를 둘러싼 세상(현상)에 대하여 잘 알려면 먼저 나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나랑 소통을 시도해야 하고 나에 대하여 알아지는 만큼 세상도 서서히 알아지게 되니까요. 나랑 소통하기, 나에 대하여 알기부터 어려우니까 ‘인문학 공부’를 포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무엇을 행동하고 있는가?'
나를 더 잘 알아가기 위한 트레이닝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원래 잘 알았던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더 잘 알았으면 좋겠으니까 행동으로 실천하는 단계지요. 이 실천도 쉬운 일이 절대 아니잖아요. 첫째보다도 더 힘든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행동하지 않으면(겪어내어보지 않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 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고요. 경험해야 깨달음이 오고 깨달음이 바로 나와 현상과의 관계를 서서히 알아가는 통찰의 과정이라 생각되니까요.
'나는 지금 무엇을 희망으로 삼고 사는가?'
나에 대하여 서서히 알아갈수록, 깨달음의 빈도수가 많아져 깊이가 더해갈수록 내가 세상에 온 이유를 더 정확히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냥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려고 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선한 사명감이 저절로 생겨나게 되고 선한 사명감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진다는 것이고요.
이런 과정이 너무 어려운 과정이니까 하나도 쉬운 과정이 없잖아요. 시도해 보기도 전에 그만둔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렇게 선한 사명감을 짊어지고 살아가려는 삶의 단계까지는 안 하고 싶다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 단계까지 안 나아가 봤으니 그 사명감이 어떤 행복을 주는지 모를 수도 있을 겁니다.
왜 갈수록 더(More) 인문학일까?
왜 갈수록 더 인문학이어야 할까요? 갈수록 인문학이 그 어떤 학문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을 할까요?
인간성이 갈수록 위태위태해지니 그런 거라 생각해요. 인문학이 바탕이 된 단단한 인간들이 많은 사회라면 4차 산업 사회를 살아가고 있고, AI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인간을 넘어서지는 못할 거라고 말합니다. 나를 더 고양시켜서 세상에 선하게 기여하고자 마음먹는 인공지능 로봇은 아직 없으니까요.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학문이 인문학이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갈수록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따뜻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 로봇에게 절대 인간의 자리를 넘겨주면 안 된다는 간절한 당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과도 같은 이 거대한 산업의 물결에, 인공지능이라는 이 똑똑한 녀석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인문학을 시작하지?
인간에 대한 연구, 사람에 대한 탐구니까 사람에 대하여 알아 가면 되는 거잖아요. 사람의 삶, 즉 사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알아가면 되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너무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가 없잖아요. 내 수준에 맞게 내 주위에 있는 삶의 재료로 인문학을 시작하면 되지 않나요?
밥상토크가 인문학이다.
맞아요. 밥상머리의 대화가 인문학이라 생각해요.
“밥 먹었니?”
“책은 읽었고?”
이런 점검형 대화가 아닌 소통의 대화를 하자는 겁니다.
"오늘 어떻게 지냈니?"
“요즘 읽는 책은 어때?"
이런 대화로 시작해서 나누는 대화가 인문학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는 하브루타 대화네요. 밥상머리가 이런 대화가 있는 소통의 장인지, 4인 4폰 쥐고 각자의 취향대로 즐기는 시간인지요? 부모는 시간만 나면 폰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내 자녀는 인문학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키우려는 욕심은 내지 않아야겠습니다.
책과의 대화가 인문학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이해될 거예요. 왜 책과 대화를 한다고 하는지.
책 속의 주인공과도 대화하고 작가와도 이야기 나누고 결국 나와의 대화로 돌아옵니다. 나에게 질문을 하게 되니까요. 나에게서 답을 얻어내는 게 책 읽기니까요. 독서는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나랑 아주 은밀하게 그리고 아주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점 점 더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과 나누는 대화의 시간이 인문학 시간인 셈입니다.
그냥 권수만 채우는 독서는 인문학이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흔히 부모님들이 돈 천 원으로 꼬셔서 책 한 권 읽게 하는 수법 같은 것 말입니다. 잘 유도해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만들면 되는데 그걸로 그치니 말입니다. 돈도 잃고 아이도 잃게 되니 말입니다. 책과 대화를 하는 독서, 생각을 하는 독서습관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인문학이다.
부모의 삶은 보여주는 인문학 책이 아닐까요? 쉽게 풀어서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인문학 책요.
‘아, 저럴 때 우리 아빠는 저러는구나!’
‘아, 저런 상황일 때 우리 엄마는 저렇게 감정을 처리하는구나!’
‘아, 우리 부모는 저런 힘든 문제가 닥쳐도 저렇게 해결하는구나!’
부모의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도재교육이 아니던가요!
어디 꼭 완벽한 부모의 삶의 모습만 보여주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그런 부모는 자식이 부담되고 주눅 들어서 힘들어요. 완벽하지 않기에 매일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 정성껏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지요. 성공보다는 실패를 겪어내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자는 것이지요. 성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물임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도록 하면 될 것이고요. 삶의 뒷전으로 숨지 말고 당당히 정면승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지요.
부모가 보여주는 인문학 책이 가장 강력하다고 장담합니다. 아이가 가장 감동받고 가장 빨리 변화될 수 있는 인문학 책입니다. 저도 그래서 평생 선한 십자가 지고 살아가고 싶은 거예요. ‘선한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십자가 진 덕분에 나도 잘 살아가게 되고 부모 모습 보고 배워서 내 자식도 잘 살아가게 되니 말입니다.
일상이 인문학이다.
삶의 모든 과정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의 살아냄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가지 규칙만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요. 소통, 공감, 창조적 상상력요.
첫째. 나랑 소통 잘하면서 살아지고 있는지?(공감)
타인과 세상과의 소통의 통로가 되니까요.
둘째, 나의 감정에 잘 반응해 주는지? (소통)
내 감정에 스스로 공감이 잘 될 때 타인의 감정도 잘 보여서 공감해 줄 수 있으니까요.
셋째,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문제 해결을 하는가?(창조적 상상력)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물러서지 않고 선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실천하는지?
갈수록 더(The, More) 인문학이 답이라니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내가 더 잘 알아가는 여정이잖아요.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나 스스로 만들어 가는 실천이잖아요.
그 길을 나 자신이 꾸준히 변함없이 끝까지 돕는 과정이 인문학 공부잖아요.
이러는 과정에서 스티브잡스 같은 세상을 의미 있게 도약시킬 사람이 내 자식일 수도 어쩌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설레는 기대가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