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가령 내게 밀라노는 선량 작가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뮌헨은 진민 작가님이 사는 밀밭 가득한 곳이고, 세인트 루이스는 마마몽키님이 새로이 터를 잡아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이다.
그곳이 어디인지 어떤 곳인지, 가보지도 느끼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나에겐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곳. 소중한 사람들의 고향이자 터전, 살아가는 공간으로 먼저 인식되는 곳. 그들을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또 하나.
세상 사람들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로 기억하는 눈의 나라(雪国) 니가타(新潟)는 귀한 벗 카오루 님이 살고 계신 곳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신주쿠를 출발해 오오미야로 이동하여 죠에츠 신칸센 [とき311号] 니가타 행 열차를 타기로 했다. 점심 약속인 것을 알면서도 철도 여행에 빠질 수 없는 에키벤 가판대를 두리번두리번. 일찍 집을 나선 탓에 주릴 대로 주린 배가 정직하게 꾸르륵 반응한다. 고르고 골라 작은 몸집의 아지후라이가 놓인 노리벤 하나를 사고,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페트병에 든 녹차를 한 병 사면 여행 준비 완료. 출발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그 사이 니가타행 열차 한 대와 나가노행 열차 한 대가 순서대로 출발한다는 전등판이 보인다.
대합실 특유의 낮은 전도의 형광등이 사람들의 정수리를 비추고 있다. 평일 아침 니가타를 향하는 발걸음은 삶의 한 복판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출장이거나, 귀성이거나. 그들 사이에서 조금 동떨어져 보이는 여행객은 나와 프랑스어를 주고받는 백패커 두 명 정도다. 그들도 누군가를 향해 가는 것일까.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雪国』_ 川端康成著
『설국』 _가와바타 야스나리, 민음사, 유숙자 옮김
니가타에 다녀온다 했더니 레일라 님께서 큰 숙제를 주셨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정말 설국인지, 과연 어떤 느낌일지 전해 달라고. 그래서 터널이 나올 때마다 도시락을 먹던 젓가락을 허겁지겁 내려놓고 카메라를 들어 어둠이 걷히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터널은 하나가 아니라 일곱 개. 조금 긴 터널이 한 번, 아주 긴 터널이 한 번, 아주 짧은 터널이 한 번, 꽤 긴 터널을 또 한 번 지나니 거짓말처럼 설국이 나타났다! 눈은 아주 희고 묵직하게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멈춰 있는 세상을 횡으로 달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내로 가까워질수록 처음엔 도로가, 다음은 지붕이, 더 가서는 논과 밭이 저마다의 색을 드러냈다. 세 번의 터널을 더 지나자 열차가 곧 니가타 역에 도착한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ホームで待ってます」
홈에서 기다릴게요.
아침에 온 메시지에 그렇게 적혀있어서, 열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내내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 멈춰 서자 창 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여 나도 모르게 ‘여기에요 여기!’라고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가 닿지는 못했다. 행렬에 끼어 좁은 복도를 펭귄 걸음으로 빠져나와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와-아! 카오루상!’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손을 흔들며 한 달음에 다가와 주었다.
카오루 님은 나보다 키가 조금 더 컸고 머리숱은 풍성했으며 스타일이 좋았다. 무엇보다 10시 48분부터 16시 57분 사이의 짧은 체재 시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먹을지 까지 모든 동선을 표로 정리해 주시는 꼼꼼함과 다정함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공사가 한창인 니가타 역사(駅舎)를 헤매는 일 없이 니가타의 음식과 술, 공예품과 특산품을 두루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한 곳은 니가타 시의 구 시가지에 위치한 향토 요리 전문점 「わっぱ飯 田舎家」(왑파메시 이나카야). 1952년부터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노포(老舗) 답게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잘 닦여 윤이 나는 테이블, 신발을 벗은 스타킹 아래로 까슬하게 닿는 다다미의 감촉이 좋은 곳이었다.
니가타는 뭐니 뭐니 해도 쌀. 그 맛있는 쌀로 밥도 짓고 술도 빚는다. 흔히들 아는 메이저 급 브랜드인 쿠보타(久保田)나 핫카이산(八海山) 외에도 니가타에서만 접할 수 있는 일본주의 종류가 백여종에 달해 실로 애주가들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으로 나온 것은 도쿄에서는 접해본 적 없는 니가타 요리 놉페(のっ平). 재료는 토란, 당근, 우무에 죽순, 버섯, 연어와 닭고기도 들어가 있어 어디서부터 젓가락을 댈지 즐거운 고민에 빠지게 하는 음식이다. 투명하고 빨간 연어알에 열을 가해 눈 덮은 듯 하얗게 변한 토토마메(とと豆)는 특유의 비릿함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고 하는데 풍미와 식감이 남아있어 내 입에는 잘 맞았다.
외에도 투명한 선홍빛의 아마에비(甘エビ)와 보드라운 꽃오징어(花イカ)도 술맛을 돋궜다. 첫 잔은 가볍고 깨끗한 입맛의 시메하리쯔루(〆張鶴), 두 번째 잔은 가격만큼이나 맛도 높은 계절 한정 술 북설(北雪)을 마셨다. 얼큰히 취기가 올라오는 타이밍에 노도구로(のど黒)의 소금구이를 마지막으로 메인 식사인 왑파메시(わっぱ飯)가 나왔다.
원통형 목제 용기인 왑파(曲げわっぱ)에 밥을 지어 재료를 얹은, 가마메시의 왑파 버전이었는데 나무의 향과 짭조름한 다시의 풍미가 진하게 배어있어 지금까지 먹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야무지게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새우, 게, 굴, 닭고기 등 종류는 다양했지만 추천대로 연어와 연어알이 가지런히 놓인 연어오야코(鮭親子)는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기분 좋게 포렴을 빠져나오니 점원 분께서 친절하게 '사진 찍어드릴까요’ 말 걸어준 덕분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카오루 님과의 사진도 남길 수 있었다.
이후 버스를 타고 역으로 돌아와 눈요기만 했던 기념품 코너에 다시 들러 가족들과 함께 즐길 일본주며 맥주, 센베와 떡을 잔뜩 바구니에 담았다.
짧고 굵게 니가타를 온몸으로 즐기고 소프트 아이스크림과 아이스커피까지 디저트로 마무리하면서 카오루 님과 나는 끊이지 않는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채비를 하고 다시 우리가 만났던 플랫폼을 향하면서 다음엔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며 하룻밤을 같이 보내기로 약속했다. 물론 금방은 아닐 거다. 언제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아쉬움과 애틋함, 기대를 남긴 만남이었다.
카오루 님과의 만남으로 니가타를 더 깊이 알게 되어 기쁘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니가타는 카오루 님의 니가타.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도 그녀를 만나기 위한 길일 것이다.
귀한 시간을 내 주신 나의 벗, 카오루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