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 다이어리⑤ 포기해야 느낄 수 있는것

▲ 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에 있는 두 국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땅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5. 포기해야 느낄 수 있는 것

또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일어났다. 늘 ‘일찍 일어나 해가 뜬 후 바로 여행을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지치고 힘든 몸은 일찍 깨어날 줄을 모른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뜨거운 햇빛이 텐트를 휘감아 땀을 흘릴 정도로 해가 강하게 비추고 있었다. 부시시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와 보니 주변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밤, 어둠 속에서 ‘이정도면 사람들한테 안 보이겠지’ 하고 자리를 잡았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던 듯하다.

다행히 짐이 사라지거나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주변을 경계하며 일어나자마자 빠르게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침낭을 말아 넣고 옷을 갈아입은 후 텐트폴대를 빼서 정리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스쿠터가 한 대 다가온다. ‘경찰인가? 아니면 시비를 걸려는 건가?’ 하고 경계하고 있는데, 어린 아이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오는 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즈드랏스부이쪠!”

우리에게 다가온 그는 자신도 라이더라며 자신의 바이크를 보여 주겠다면서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하지만 우리는 캠핑 장비를 정리하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그의 초대를 거절했다. 아쉬워하던 그는 우리에게 선물이라며 러시아의 화폐 중 가장 큰 단위인 5000루블(한화 약 9만원)짜리 지폐를 크게 확대한 기념품을 한 장씩 건넸다.

▲ 러시아 바이크 라이더가 준 5000루블 짜리 지폐 기념품(위)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같은 라이더라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선물을 챙겨주는 그가 참 고마웠다. 다시 한 번 러시아 라이더들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떠나고, 남은 짐을 정리한 우리는 노인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연락을 달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고 무사히 한국에 도착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어제 먼저 하바롭스크에 도착해 숙소를 잡고 있던 형님 두 명과도 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시내 쪽으로 이동해 식당에 가기로 했다. 며칠 동안 라면만 먹었더니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었고, 여행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이 아닌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어보고 싶기도 해서였다.

러시아에서는 식당을 주로 ‘카페(Кафе)’라고 부른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괜찮아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말로만 들었던 러시아 음식인 샤슬릭을 주문했다.

샤슬릭은 ‘꼬치구이’를 뜻하는데, 양고기ㆍ소고기ㆍ돼지고기ㆍ닭고기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해산물도 꼬치로 구워 먹는단다. 고기를 양념에 재놓은 뒤 숯불에서 골고루 익혀 먹는데,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라고도 한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큰 페트병 콜라 한 병과 샤슬릭을 하나씩 주문했다. 식당에는 숯불 화로대가 준비돼있었는데, 점원이 계란판과 종이 등 쓰레기를 화로대에서 태우고 있었다.

▲ 러시아의 전통음식인 샤슬릭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는데, 화로대에 계란판 등 쓰레기를 태우고 있다.

‘쓰레기도 저기서 다 태우는 구나’ 하고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기다렸다. 잠시 후 아주 먹음직한 샤슬릭이 나왔다. 두툼한 고기가 긴 꼬치에 끼워져 육즙이 뚝뚝 흐르고 있었는데, 한 입 베어 물자 입안에서 종이 탄 냄새가 진동했다.

▲ 잠시 기다린 후 받은 샤슬릭. 먹음직한 모습과는 반대로,종이 탄내가 진동을 하는 독특한 맛이었다.

힘들고 배도 많이 고픈데다가 모처럼 돈을 내고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는데, 이정도 수준의 음식밖에 안 된다는 것에 순간 짜증이 났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따질 수도 없었다. 결국 여행 첫날 양고기 햄을 먹을 때처럼 ‘식량이다’ 생각하고 주문한 음식을 싹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는 식당 화장실 세면대에서 한 명씩 돌아가며 씻었다. 개운해진 우리는 도시를 떠나기 전에 먹을거리도 살 겸 동네를 조금 돌아다니기로 했다. 잠시 후 바이크 숍이 보였다.

러시아에서 처음 만난 바이크 숍이었다. 들어가 보니 중국산 바이크들과 엔진오일 등 소모품을 팔고 있어서 각자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나는 특별히 필요한 물품이 있던 것도 아니고 돈 걱정을 한참 하던 터라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다.

바로 비로비잔을 향해 출발했다. 아침에 화창했던 날씨는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하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릴수록 빗방울은 굵어졌다. 도로는 완전히 다 젖었고 군데군데 물웅덩이도 생겼다. 러시아의 도로는 정비 상태가 굉장히 안 좋다. 아스팔트는 다 깨져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고, 뚜껑 없는 맨홀이 덩그러니 있는 곳도 있다.

발목 높이 정도의 포트홀[도로가 파손돼 냄비(Pot)처럼 생긴 구멍(Hole)이 파인 곳]을 만날 때마다 급하게 바이크를 기울여 피하곤 했는데, 비 때문에  미끄러질까 걱정하기도 했다.

주유소에서 잠시 비를 피해 챙겨온 우비를 입고, 핸드폰을 지퍼팩 안에 넣고, 방수 부츠커버를 신었다. 완벽하게 채비를 끝냈지만 그칠 줄 모르는 거센 비는 이내 온몸으로 스며들어 속옷까지 적셨다.

처음에는 스며드는 비가 짜증나고 찝찝했는데, 어느 정도 젖고 나니 ‘그래 차라리 왕창 내려라’ 하는 생각을 했고, 이내 홀가분했다.

여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온몸이 완전히 다 젖고 나서야 느끼는 해방감이 그렇게 달콤할 줄 몰랐다. 다 포기하고 나서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옷이나 짐을 말리는 것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비가 그치지 않고 더 많이 내리길 바라며, 시야 확보를 위해 헬멧 쉴드(shield)를 닦으며 계속 달렸다.

한참을 달려 비가 오는 지역을 벗어나 잠시 멈춰 우비를 벗었다. 앉아서 잠시 쉬고 싶었지만, 온갖 벌레들이 몰려와 우리를 공격했다.

모기뿐만 아니라 쇠파리, 처음 보는 이상하게 생긴 벌레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대는 통에 도저히 가만히 쉴 수 없었다. 계속 움직이며 우비를 벗고 주변을 빙빙 돌아다니면서 빵을 먹었다. 결국 빵을 먹자마자 바로 출발해 잠시 후 비로비잔에 도착했다.

비로비잔은 하바롭스크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철물점 같은 가게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기로 했다. 안에는 각종 칼과 도끼, 가스총 등이 진열돼있었는데, 한참을 구경하다가 단도 등 물건을 하나씩 구매했다.

▲쇠로 된 비비탄이 발사되는 가스권총

나는 쇠구슬을 발사하는 가스총을 한참 구경했다. 권총 모양의 작은 총인데, 압축된 가스를 원동력으로 비비탄 총알과 똑같이 생긴 쇠구슬을 발사하는 총이다. 주인 설명으로는 살에 박힐 정도의 힘을 가졌다. 이 총 하나만 있으면 여행이 꽤 안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체 게바라도 아버지가 챙겨준 리볼버 한 정을 갖고 여행했고, 위급한 때에 그 총으로 위험을 벗어난 적도 있었다고 하니 그 총을 더욱 사고 싶었다.

하지만 10만원 가까이 되는 가격에 결국 포기하고 내려놓았다. 가게 주인도 내심 아쉬운 눈치였다. 칼이나 다른 물품의 가격과 비교하면 굉장히 비싼 물건이었기에, 그것 하나만 팔아도 하루치 매상이 될 것 같았다.

가게를 나와 깨끗한 방에 안전한 주차장까지 마련돼있는 숙소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루 머물기로 했다. 숙소 뒤편으로는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큰 마트도 있었는데, 마트에서 맛있는 것들을 잔뜩 사서 먹고 푹 쉴 생각으로 숙소를 일찍 잡았다.

숙박비를 지불하고 바이크를 주차장으로 옮겨놓기 위해 숙소 앞으로 나와 일행들과 얘기하고 있는데, 자전거를 탄 동네 꼬마들이 우리가 신기한 듯 잔뜩 몰려나왔다.

초등학교 저학년 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었는데, 처음에는 조용히 다가와 바이크를 구경하거나 우리에게 말을 걸더니,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 나이 특유의 장난기를 발동해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 숙소앞에서 우리에게 욕을 하고 도망가던 러시아 꼬마 '헤이직'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욕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꼬마들이 도망가면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따라가는 식으로 한참을 놀았다. 꼬마들의 대장 격인 아이는 헤이직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였는데, 자기보다 나이가 몇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를 때리고 도망가거나 우리에게 손가락 욕을 하는 등 짓궂은 장난을 치곤했다.

장난이 점점 심해져 ‘이놈 꿀밤이라도 한 방 먹여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골목길에서 아이들의 가족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쥐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 남자도 우리가 신기한지 근처에 와서 한참 말을 걸고 구경했다. 우리는 갖고 있던 사탕을 아이들에게 한 개씩 건네고 인사한 후 바이크를 창고에 넣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마트 규모가 생각보다 꽤 컸다. 우리나라 대형 마트까지는 아니었지만, 코너별로 잡화나 음식, 술 등 다양한 물품이 구비돼있었다.

며칠간 고생한 만큼 실컷 먹고 푹 쉬고 싶었기에 우리는 하루치 쓸 돈을 저녁식사에 다 쓰기로 했다. 러시아 전통음식인 샤슬릭과 당근김치를 사고, 컵라면ㆍ샐러드ㆍ맥주까지 잔뜩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 숙소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하루치 식비를 몽땅 털어 사온 저녁식사

음식을 먹으며 이십대 청년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고민부터, 이 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을 얘기했다. 이곳 비로비잔이라는 도시도 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달리고 있는 길을 달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이 여행이 더 특별해진다. 그리고 함께 달리고 있는 친구들이 더 소중해진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만의 여행을 하게 된다. 함께하는 여행은 물론 즐겁지만 내심 얼른 혼자가 됐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처음 마음먹었던 것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처음에는 혼자인 게 두렵기만 했는데, 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이 여행도 조금은 익숙해진 듯하다. 걱정과 두려움이 컸지만, 막상 부딪쳐보니 오히려 여행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모든 순간을 여행으로 여기니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즐거웠다.

기분 좋은 저녁, 취기가 조금 오른 상태에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자투리 여행정보 - 05 : 비로비잔

▲ 비로비잔의 도시 입구를 표시하는 탑

비로비잔의 지명은 하바롭스크에 있는 아무르 강의 지류(支流)인 비라 강과 비잔 강에서 따왔다. 

하바롭스크에서 약 180km 떨어진 이 도시는 1930년대 초까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작은 역이 있는 마을이었는데, 1930년대에 소련 정부가 유대인 정착지를 설립하며 도시 규모가 커졌다. 유대인 자치주의 주청(州廳) 소재지지만 현재는 대부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고, 유대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2014년 기준으로 인구는 약 7만 5000명, 면적은 약 200k㎡이다. 2010년부터 대한민국 의정부시와 우호협력관계를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