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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희의 딸 Sep 06. 2019

11. SUPER RICH 중국인들

 

밴쿠버 내 최근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새 주인을 찾고 있는 한 집. 유럽스타일의 오래된 주택은 사라지고,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채광이 잘 되는 유리집이 많이 늘었다.

    한국에서 내가 만난 중국인들은 주로 한국 면세점을 찾는 관광객 중국인, 교환학생으로 잠깐 한국에 온 학생들이었다. 가장 근접해서 중국어를 많이 들었던 경험은 아이를 봐주시는 중국동포 이모님이셨다. 90세가 넘어 누군가가 옆에서 살림과 부축, 말동무를 해줘야 하는 외할머니 곁에도 중국동포 이모님이 계셨다. 그 분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조부모의 나라’ 한국으로 보는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자랐던 중국 길림성으로 보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와 조금 다른 말투, 그리고 중국에 두고 오신 가족들 이야기를 하실 때나, 또는 위챗 인터넷전화로 빠른 중국어로 ‘다다다’ 이야기 할 때. 그런 때는 중국인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캐나다 밴쿠버에서는 중국어를 흔하게 들을 수 있다. 홍콩인이 쓰는 중국어와 메인랜드 중국어가 다르다고 한다. 1990년부터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홍콩 부자들이 앞다투어 캐나다로 향하면서 밴쿠버는 ‘홍쿠버’라는 별명이 붙었다.

 

    물론 중국인들의 캐나다 이민 역사는 1900년 전인 19세기부터, 즉 130년 훨씬 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미국의 서부개발과 비슷하게, 캐나다 서부에서 동부까지 잇는 철도와 주요 시설물 건축에 중국인들이 투입되었다. 밴쿠버의 다운타운 동쪽 핵심지역에는 ‘차이나타운’이 있다. 혹자는 이렇게 좋은 자리에 차이나타운이 들어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이민 역사가 길고, 캐나다 정부 역시 그들의 기여도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캐나다 정부 역시 1900년대 초, 중국인들에게 ‘사기’를 쳤다. 철도를 놓고 인부일을 하던 중국인들은 본토에서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저임금을 견뎠다. 그러나 급격한 중국인 유입을 걱정했던 ‘백인 중심’의 캐나다 정부는 중국에서 가족을 데려올 경우 1인당 ‘인두세’를 아주 높게 책정했다. 사실상 가족이 뭉쳐 살지 못하도록 장벽을 세운 셈이다. 돈을 마련하지 못해 30년 넘게 헤어져 산 가족들도 있다고 한다. 지금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것처럼, 물리적인 장벽은 아니지만 ‘법적’ ‘경제적’ 장애물을 설치해놓고 뛰어 넘으라고 강요한 셈이다.

 

    중국인들의 급격한 유입이 최근 부각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  부를 축적한 본토 중국 부자들이 일종의 ‘세금 탈루’의 수단으로 캐나다에 자산을 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지금은 캐나다 퀘백주를 제외하고는 투자이민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졌다. 이들은 돈으로 영주권을 산 뒤, 집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부동산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폐해를 경험한 캐나다는, 투자이민을 막았다. 막상 영주권을 취득한 이후에는 캐나다 경제를 살리기 보다는, 중국인 아버지는 중국에서 돈을 벌고, 아이들과 부인만 캐나다에 남았기 때문이다. 간혹 중국 내 자산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보육수당(차일드 베네핏)까지 챙기는 경우도 있다. 집을 여러 채 사들인 후, 캐나다 사람들에게 렌트를 내주지도 않고, 그냥 집값이 오르기만 기다리고 있는 경우까지 생겼다. 2019년부터 캐나다 정부가 '빈집 세'를 받기 시작한 이유다.

   

    광역 밴쿠버의 지도를 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듯한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광역 밴쿠버'는 밴쿠버 이외에 인접한 버너비(Burnaby), 리치몬드(Richmond), 써리(Surrey), 랭리(Langley) 등을 모두 포괄한 지역 명칭이다. 그 중 ‘그냥 중국’이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리치몬드 지역이다. 리치몬드 지역에는 간판 자체가 모두 중국어로 써져 있다. 상점에서 백인 매니저가 중국말을 못하면 의아해하는 중국고객들도 많다. "우리 인원 수가 얼마인데 중국어를 못하느냐"는 자부심과 자만감이 읽힌다. 중국 상권은 어마어마하다. 리치몬드의 애버딘 스퀘어(Aberdeen Square)라는 쇼핑센터를 가면 중국인과 아시아인들로 가득차 있다.

 

    리치몬드에 중국인들이 많이 몰려 살게 된 이유는 뭘까. 지역적으로 예전에는 밴쿠버 중심가보다는 외곽인(현재는 외곽이라고 할 수 없다) 리치몬드에 중국인들이 타운을 형성했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또는 ‘용머리’의 ‘턱’ 부분에 해당하는 리치몬드 지역이 돈(여의주)을 꽉 깨물고 있는 듯한 모습이 좋아 중국인들의 선호도가 높다는 설명도 있다.

 

밴쿠버 웨스트 지역은 캐나다 이민역사 초기부터 영국, 프랑스의 관료들이 많이 정착한 곳이다. 백인 위주의 커뮤니티는 15년 전부터 중국인들이 유입되면서 많이 달라지고 있다.

    중국인들의 머니파워가 워낙 쎄다보니, 백인들이 모여 살던 밴쿠버 올드타운의 모습도 바뀌고 있다. 밴쿠버는 바다에 접해 있다. 처음 영국과 프랑스의 이민자들 중 고위관리자, 공무원, 귀족이 모여살던 ‘밴쿠버 웨스트(Vancouver West)’ 지역은 20년 전만 하더라도 아시아인을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15년 전부터 중국 부자들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주택들을 대거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집값이 3,4배 뛰어올랐다. 밴쿠버 웨스트는 학군이 좋아 영어공부를 시키며 과외활동, 체육, 악기를 시키려는 중국인 젊은 부모들이 많다.

 

    중국인들의 부동산 구매 열풍으로 인해, 젊은 캐나다인들의 반발도 커졌다. 다운타운 렌트를 하기 어려워지면서 직장을 다녀야 하는 캐나다 직장인들은 외곽으로 쫒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밴쿠버 선거에서도 ‘지불할 수 있는(affordable) 주거비가 되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건 정치인들이 많았다.

 

    람보르기니, 페라리와 같은 슈퍼카를 타고 다니는 ‘부모 잘 만난’ 20대 중국인 슈퍼리치를 보는 캐나다인들의 심기는 복잡하다. 많이 배운 사람들일수록 인종차별을 보이게 하지는 않는다.

 

    부자 중국인들은 말이 통하는 중국인들끼리 다닌다. 그들의 부는 상상보다 더 대단하다. 그리고 촌스럽지 않다. 상류층 생활에 오래 노출되고 본인들도 젊을 때 외국에서 유학을 한 경우가 많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옷도 잘 입는다. 외국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기 위해 축구교실, 아이스하키 교실에도 적극적으로 보낸다. 원서로 도서관에서 책을 부담없이 읽고, 백인과 똑같은 영어로 농담을 하는 중국인 청소년이 흔하다. 아마 이들은 미국 아이비리그나 캐나다 명문대로 진학한 뒤, 이곳에 남거나 본토 중국으로 돌아가 높은 지위로 일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일식당에서는 팁에 후한 중국인들이 꽤 있다. ‘니기리 스시(스시 한 알)’ 가격이 성게알 5달러라고 써져 있으면 젊은 백인들은 묻는다. “여기 몇 개 들어있나요?” 1개 가격이라고 하면, 캘리포니아롤처럼 싸고 밥알이 많아 배를 채울 수 있는 ‘롤’로만 시킨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메뉴판 가격에 구애 받지 않는다. “오마카세 세트, 디럭스 사시미 세트로 주세요.”

 

    캐나다에 온 유학생 어머니들 중에는 중국인들에 대해 편견 내지는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여기까지 와서 중국인들이 많이 있는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는 둥, '백인들이 많은 아보츠포드나 칠리왁 지역으로 들어가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것이 이유다. 나는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것이 아닌데, 어떤 한국인 이민자에게 “이 학교는 아시아인들이 많나요?”라고 (내 딴에는) 그냥 질문을 했다가 혼난 적이 있다. “그런 말 절대 교육청 직원에게 묻지 마세요. 인종차별 하냐며 대답을 거부하거나 당신을 이상하게 볼꺼에요.” 그만큼 밴쿠버에서 중국인을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다. 밴쿠버의 주류는 확실히 중국인이다. 그것도 잘 사는 중국인들.

  

    한국에서는 서로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서로를 구분짓고 서로를 때로는 미워하면서 투덜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먼 타지에 오니까 그 동안에는 시큰둥했던 서로의 관계가 돈독해지기도 한다. 덩치가 큰 유럽인이나 미국인, 캐나다인, 또는 외모가 우리와는 또 다른 인도인들 사이에서 ‘비슷하게 생긴’ 동북아시아인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 학교를 다니는 둘째도 중국인 친구가 따뜻하게 대해줘서 학교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었다. 그 중국인 친구는 말이 전혀 안 되는 둘째 아이에게 첫날부터 잘해줬다고 한다. 아마 그 친구도 혼자 외로웠던 걸까. 아니면 어린 시절 갑자기 닥친 ‘영어 시련’에 동병상련을 느꼈을까.

 

    때로는 ‘짜증이 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중국인들의 재력 때문에 캐나다인들이 외모가 비슷한 아시아인들에게도 호의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인 나도 덕을 보긴 한다. 아직 많은 중국인들을 만나지 못해 이들의 삶을 잘 알진 못한다. 그러나 이들이 각 나라에 뿌리를 내리며 주류로 자리잡는 노력은 높게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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