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포토에세이 #1] 초록의 바다, 케냐 케리초
2004년 1월과 2월 사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케냐의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케냐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던 뜨거운 '차(Chai)'와 갓 구워낸 고소한 '차파티(Chapati)'. 그 익숙한 맛의 뿌리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나이로비에서 서쪽으로 250km를 달려 도착한 곳은 해발 2,000m의 고원 도시 "케리초(Kericho)"였습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초록의 바다'였습니다. 끝없이 이어진 차 밭은 저 멀리 수평선 대신 하늘의 구름과 맞닿아 있었고, 고산 지대의 서늘하고 쾌적한 공기는 마치 환영 인사를 건네는 듯했습니다. 나는 자꾸만 차를 세우고 그 길을 걷고 싶어졌습니다.
차 잎을 따는 이들의 밝은 미소는 케리초의 푸른 풍경과 너무도 잘 어우러졌습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 너머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삶의 굴곡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토록 평화로운 풍경 속에 뿌리내린 차와 차파티의 조합은 사실 19세기 말, 영국의 철도 건설을 위해 건너온 인도인 노동자들의 손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밀가루 반죽 '차파티'와 영국이 이 비옥한 고산지대에 강제로 심은 '차 나무'가 만나 케냐만의 독특한 식문화를 이룬 것이죠.
인도인들의 영향으로 케냐인들은 차에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어 끓여 마시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고된 노동 후 에너지를 보충하기에 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독특한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집인지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이색적인 형태였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차 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숙소였습니다. 회사마다 제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집들은 노동자의 가족들이 모여 사는 최소한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방 한두 개가 전부인 좁은 공간, 공동으로 물을 길어다 써야 하는 불편함. 겉으로 보기엔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풍경일지 몰라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척박한 현실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사실 이 주거 형태는 식민지 시절, 영국이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고 관리하기 위해 고안한 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광활한 차 밭의 아름다움 뒤에는 자본과 노동, 그리고 식민 지배의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향긋한 홍차 한 잔에는 케리초의 맑은 공기와 노동자들의 밝은 웃음,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20여 년 전 사진 속 그 풍경은 여전히 푸르겠지만, 그 속에 살던 사람들의 삶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요? 케리초의 차 밭을 다시 떠올리며, 오늘 마시는 차 한 잔의 무게를 새삼 느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