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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Jun 04. 2024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경쟁을 배웁니다 (민들레 151호)


JTBC의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3> 첫 방송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아는 참가자가 이렇게 많다니. ‘어머, 저 남자 <슈퍼스타K2>에 나왔었는데, 그게 벌써 몇 년전이야? 지금은 바버샵을 한다고?’, ‘저 남자는 <팬텀싱어1> 우승자잖아! 팀으로 활동 잘하는 줄 알았는데 팀 활동이 잘 안되나?’, ‘어머머머, 저 여자는 <슈퍼스타K7>에 나올 때 아기 같았는데 이제 아가씨네.’ 수많은 오디션 프로의 참가자 계보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지는 순간이다. (<싱어게인3>에 기존 오디션 프로 참가자들이 유독 많이 참가했기 때문이지만) 오디션 프로 덕후로서 나의 ‘가방끈’이 이토록 길다는 것에 감탄했다. 


오디션 프로는 나의 ‘길티 플레저’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섭렵하며 살아왔지만, 오랫동안 오디션 프로그램은 내게 ‘길티 플레저’(영어 Guilty와 Pleasure를 합성한 말로, 죄책감과 동시에 즐거움을 느끼는 심리를 뜻하는 말)였다. 이삼십대의 나는 Mnet <슈퍼스타K>(이하 슈스케) 시리즈를 보며 많은 금요일 밤을 보냈다. 금요일 밤의 <슈스케>는 불닭볶음면 같았다. 너무 맵고 짠데, 몸에 안좋을 게 뻔한데, 멈출 수가 없다…. <슈스케> 속의 서바이벌은 ‘굳이 이렇게까지?’ 싶은 것 투성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생방송 진출자를 겨루느라 참가자들은 체력과 멘탈의 한계에 다다르고, ‘악편’(악마의 편집)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가족의 죽음, 질병, 가난 등의 서사가 있는 참가자에게 많은 비중을 몰아주느라 좋은 무대를 하고도 주목받지 못하는 참가자도 많았다. 여러 번의 “60초 후에 공개됩니다”를 넘어 다음 화 예고편까지 달리고 나면, 내가 오디션에 참가한 것마냥 진이 빠졌다.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흥행을 이끈 프로그램은 2009년 Mnet에서 방영한 <슈퍼스타K>다. 18.1%라는 최고시청률을 기록하며, 2016년 시즌8까지 방영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오디션 프로그램을 시청했을까? 왜 시청에서 끝나지 않고 비하인드 영상을 찾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평을 염탐하고 탈락한 참가자 근황을 검색했을까? 거의 모든 서사에 환장하는 나는, 음악에 대한 꿈과 좌절 속에 얼룩지고 피어나는 참가자들의 서사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들의 서사는 대본 없는 드라마였고, 그들이 들려주는 음악과 결합해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했다. 경쟁 관계이면서도 동료가 되어가는 참가자들의 관계성 역시 내가 환장하는 포인트였다. 연구자 김수정은 <슈스케>로 대표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서구의 포맷을 일정 정도 모방했음에도,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정서구조에 따라 독특한 특성을 형성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슈스케> 시리즈에서는 경쟁의 관계를 합숙 등의 장치를 통해 유사가족 관계로 전환시키고, 가난과 소외로 주변화된 참가자들의 사연을 강조하고 불우한 환경의 참가자가 최종승자가 되도록 함으로써 평등에 대한 사회적 갈구를 ‘정서적 평등주의’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슈스케>의 불닭볶음면맛 경쟁 뒤에는 경쟁에서 시작해 협력으로 끝나는 동료애와 평등에 대한 갈구가 있었고, 나는 이 대단히 한국적인 드라마의 매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인생역전 따위 바라지 않는다면서도, <슈스케>2에서 환풍기 수리공 허각이 우승하는 장면을 보며 내 인생에 볕들 날을 은밀히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슈스케>가 성공을 거두자, <위대한 탄생>, <쇼 미 더 머니>, <보이스 코리아>, <케이팝스타> 등 케이블과 지상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방영을 시작했다. 이중 가장 적나라한 경쟁 방식을 도입했던 것은 Mnet <프로듀스101> 시리즈다. 101명의 아이돌 연습생을 A부터 F까지 등급을 매기고, 등급에 따라 다른 색깔의 연습복을 지급하고 높낮이가 다른 무대에 서게 했다. F등급의 연습생은 무대 뒤편에서 카메라를 받지 못한 채 춤을 춰야 했다. 이 모든 등급과 순위가 ‘국민 프로듀서의 선택’이라던 <프로듀스101> 시리즈는 제작진의 투표 결과 조작이 밝혀지며 막을 내렸다. 제작진을 욕하면서도 이 프로그램을 끊지 못했던 나는, 포승줄에 묶인 채 유치장으로 이송되는 제작진을 실시간 뉴스로 보며 선언했다. ‘이놈의 오디션 프로, 진짜 때려친다!’ 

*주: 2019년 방영된 <프로듀스 X 101> 최종 순위의 득표 차이가 동일한 상수의 배수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투표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다. 수사 결과, 최종 순위가 제작진의 투표 조작 결과로 밝혀졌다. 제작진은 <프로듀스 101>과 <프로듀스 101 시즌2>에서는 투표 결과를 조작해 특정 연습생을 탈락시키고, <프로듀스 48>, <프로듀스 X 101>에서는 최종 데뷔할 멤버와 순위까지 사전에 정해놓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으로 김용범 CP는 징역 1년 8개월, 안준영 PD는 징역 2년, 그리고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에겐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매운 맛 오디션의 시대는 갔는가


때마침 출산과 육아가 맞물리면서 오디션 프로를 한동안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탈덕’(덕질을 탈퇴한다는 뜻) 결심은 번복하라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슬금슬금 다시 오디션 프로를 보다 보니, 오디션 프로의 지형 변화가 눈에 띈다.

 

2020년 방영을 시작한 JTBC <싱어게인> 시리즈는 참가자의 음악적 세계를 존중하고 이에 감응하는 ‘착한’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최근 <싱어게인3>에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한 참가자에게 임재범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기회는 저희가 드린 게 아니라 본인이 얻은 거예요. 저희한테 감사하다고 하실 필요 없어요. 저희도 노래하는 선배일 뿐이고 먼저 노래했다는 것밖에는 내세울 게 없습니다.” 심사위원으로서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려는 그의 자세에 감탄했다. 고압적인 자세로 독설을 날리면서도 엄청난 문화 권력을 누리던 과거 오디션 프로의 심사위원들을 떠올려보면, 격세지감이다. 


2021년 방영된 Mnet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 시리즈는 고전적인 Mnet식 경쟁 구도를 차용하면서도 그간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던 댄서의 세계를 조명해 신선함을 주었다.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라는 한 참가자의 말처럼,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무대에 임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페미니즘 리부트와 맞물려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2019년 방영을 시작한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 <내일은 미스터트롯> 시리즈는 오디션으로서는 생소한 트롯 장르를 앞세우면서, 경쟁 구도보다는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무대를 선보이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아이돌 데뷔 과정에 비하면 입시교육은 순한 맛?


그렇다면 오디션 프로그램의 매운 맛 경쟁은 이제 끝난 것일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프로듀스101 시리즈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는 아니지만 Mnet <걸스플래닛>, <보이즈플래닛> 등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여전히 순항중이고, 대형기획사의 경우 자사 연습생을 대상으로 자체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아이돌 기획과 양육에 직접 참여하고자 하는 케이팝 팬덤의 요구에 부합하고, 아이돌의 데뷔 전 ‘떡밥’(팬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주는 콘텐츠)을 많이 제공해준다는 측면에서 방송사와 기획사에게 여전히 ‘남는 장사’다. 


2023년 여름에 방영한 JTBC의 <R U Next?>를 우연히 보았다가 프로그램 진행 방식이 <프로듀스101> 시리즈와 너무나 흡사해서 놀랐다. 중요한 무대에서 연습생의 실수 장면을 반복적으로 재생하기, 실력이 늘지 않는 연습생에게 호통치는 트레이너를 ‘사이다’ 장면처럼 연출하기,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경쟁의 장치들을 만들어서 ‘멘붕’(멘탈 붕괴를 뜻하는 말)을 겪는 연습생들을 관찰하기, 연습생들의 ‘멘붕’이 결국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아름다운 과정이라고 마무리하기…. 방탄소년단으로 유명한 대형기획사 하이브의 걸그룹을 선발하는 이 프로그램의 참가자 평균 연령은 18세였다. 


프로그램으로 제작하지 않더라도, 아이돌로 데뷔하기 위해 연습생들이 치르는 경쟁은 상상 이상이다. 대형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이돌 고시’라고 불릴 정도로 어렵지만, 합격하더라도 기약 없는 데뷔를 위해 혹독한 연습을 거쳐야 한다. 한 달에 한번 월말평가를 통해 실력을 평가받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방출된다. 2018년에 방영된 JTBC2 <YG보석함>에는 이 방출 과정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드러난다. 신인개발팀 직원이 한 연습생을 불러 방출 소식을 전하고, 팀으로 함께 월말평가를 준비했던 연습생들에게 “△△가 오늘까지만 같이 하게 됐어”라고 말한다. 연습생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자 곧바로 신입 연습생들이 연습실에 들어온다. “인사해. 오늘부터 같이 연습하게 될 ○○라고 해.” 이 장면의 캡처본이 뜬 인터넷 커뮤니티의 베스트 댓글은 다음과 같았다. “애들 멘탈 관리가 되나? 저러면 사람한테 정 안주고 살게 될 듯.”  


이 혹독한 트레이닝 시스템을 감당하는 연습생의 나이는 10대 초반까지 낮아졌으니, 악명높은 우리나라의 입시교육도 이에 비하면 순한 맛일지도 모르겠다. 오디션 프로에 대한 길티 플레저가 케이팝 시장 전반에 대한 길티 플레저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디션 프로를 통해 경쟁의 모순과 균열을 간파하는 시청자들


오디션 프로그램이 신자유주의 시대, 경쟁 사회의 문화적 표상이라는 연구자들의 지적에서 피할 곳은 없다.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사는 나는, 하루 치의 경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남의 경쟁을 감상한다. 경쟁에 반대한다면서 경쟁의 형식이라야 음악에 오롯이 집중한다. 과도한 경쟁 장치를 남발하는 제작진에게 분노하다가도 참가자들을 연민하면서 열혈 시청자가 되어버린다. 오디션 참가자들의 열정과 노력에 감동해, 나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러나 오디션 프로그램은 신자유주의의 필수 도구인 경쟁을 내면화하는 장이면서, 동시에 이 경쟁 내부에 일어나는 균열을 보여주는 장이다. 시청자들은 ‘악편’(악마의 편집)의 희생자가 문제가 아니라, 극한 경쟁의 판을 깔아놓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혈안이 된 참가자를 비난하는 제작진의 이중 메시지가 문제라는 걸 안다. “우승자는 불쌍한 매력이 있는 남자”라는 한 네티즌의 분석처럼, 한국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 공식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음을 안다. 투표 결과 조작이 아니더라도 오디션 최종 순위에는 참가자 개인의 서사, 회차가 지날수록 변신하는 외모, 방송 분량, 대진운, 심사위원의 음악적 스타일 등 소위 말하는 ‘음악 실력’ 외에 수많은 변수가 개입한다는 것을 안다. 그 ‘음악 실력’조차 오디션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고 평가된다는 것을 안다. 오디션에서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해도 그것은 재능과 노력의 부족이 아니라 참가자의 음악 스타일이 해당 오디션의 성격과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걸 안다. 힘들게 우승을 해도 ‘오디션 프로 낭인’으로 또다른 오디션 프로를 전전하게 만드는 음악 시장의 기형적 구조가 있다는 걸 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싱어게인3> 최종회가 방영했다. 최종우승을 차지한 홍이삭은 첫 화부터 가수로서의 ‘유통기한’에 대해 고민하며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생존에 대한 고민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편히 대할 수 없는 상황을 “아직도 나를 기억한다면 날 용서해주오”라는 가사(노래 ‘옛 친구에게’)에 이입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그의 서사에 나를 이입했다. 나 역시 글로 먹고 살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건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안다. 한 편의 글 속에서 무수한 장애물과 싸우지만 결과물은 보잘 것 없고, 대부분 알아주지 않는다. 경연 내내 나는 그가 유통기한을 고민하지 않는 유명가수로 승승장구하기를 바랐다. 최종회에서 우승을 하고 “상금 3억원”이 쓰인 피켓을 든 채 환호하는 그를 보면서, 비로소 내가 원했던 건 그의 승승장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가 유명가수가 되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꾸준히 하면서 많지 않은 무대‧음원 수입으로도 먹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불안과 자격지심 없이 가족, 친구들과 교류하며 그 교류의 결과를 좋은 음악으로 녹여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질서에 깊이 연루된 현대인이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여전히 좋은 가수와 음악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시청자로서, 내가 가진 소망이다. 


JTBC <싱어게인3>의 최종우승자 홍이삭이 우승 발표 직후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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