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노조를 만들자" 그 말이 나오기까지
*픽션과 에세이, 그 어디쯤에 있는 글입니다.
“우리 노조를 만들자.”
이 말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문이 열렸다. 그 문은 공공의 적을 대하느라 알지 못했던 내부의 모순을 대면하는 문이었다.
“문이 열리고 내면의 모순이 드러나면 이렇게 된다. 이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옳은 발언을 하기는커녕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말이 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애나 번스, <밀크맨>, 167쪽)
돌아보면 내 옆에는 늘 ‘공동체’라 부를 만한 관계가 있었다. 그런 관계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떠들썩함으로만 외로움을 외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다니던 작은 교회를 떠난 후, 나는 더이상 그런 관계를 맺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유사 교회’ 공동체가 내 옆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 공동체는 내가 다니던 직장이었다.
나의 직장은 사회 변화를 위해 일하는 NPO(Non Profit Organization)였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구성원이 많았고, 서로의 일이 독립적이기보다는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함께’라는 힘으로 불가능한 업무들을 뚝딱뚝딱 해냈다. 이들은 내게 동료였고 가장 친한 친구였고 교회였다. 서로의 일이 각자의 일상과 자연스레 얽혀들었고, 구성원의 단톡방은 업무와 사회적 이슈, 개개인의 대소사를 화제로 끊임없이 울렸다.
우리에겐 ‘공공의 적’이 있었다. 대표였다. 그는 이름이 알려진 운동가였고 자신의 힘으로 많은 후원을 끌어왔다. 그를 나쁜 대표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과거의 운동 경력을 들먹이는 ‘586 꼰대’가 아니었고, 성적인 추문에 휩싸일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현재의 직함을 발판삼아 사회의 중심부로 진입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맹렬하게 일했고 자신이 계획한 일을 자주 ‘통보’했다. 이 잦은 통보는 운동에 대한 몰입력과 속도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단체는 ‘명망가 중심의 비민주적 구조’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 발짝 나아가는 것 같다가도 반 발짝 퇴보했고, 그 나아감과 돌아옴 사이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일었다. 내 일이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시의적절한 것과 별개로, 내가 그의 손과 발이자 대체 가능한 인력이라는 무기력함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나의 무기력함이 커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페이스북 팔로워는 늘어갔고, 나는 더이상 그의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게 되었다.
페이스북에 그가 글을 쓸 때마다 달리는 수많은 ‘좋아요’와, 업무의 최전선에서 내가 느끼는 ‘싫어요’ 사이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심리학에 따라 대표의 성장배경을 분석하고, 기독교적 지식에 따라 그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동안 듣고 보아온 명망가들과 그를 비교 대조해가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겠다며 상담심리대학원이나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도, 그럴 만한 결정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을지 모른다.
노조를 만들자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올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사람을 분석하는 것 말고 단체의 구조를 바꾸는 데 힘을 모아보자는 데까지는. 참여연대에 시민단체 최초로 노조가 설립된 게 2018년이었고, 우리의 논의는 그보다 4-5년 앞서 있었다. 참고할만한 단체도, 조직도 없었다. 하지만 더이상 실망해 떠나는 구성원의 뒷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지 말자고, 누군가 바뀌길 기다리지 말고 우리 스스로를 바꾸어보자고 했을 때, 가슴 한켠이 뻐근해졌던 건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가슴 뻐근함이 환멸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체 구성원 중에는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회를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반면 소수이지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보수적인 교회를 다니는 이들도, 운동권 문화에 익숙한 전직 운동권 출신도 있었다. 편의상 나눈 이 세 그룹은 노조에 대한 입장이 모두 달랐고, 각자의 문화권에 따라 노조 설립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을 (대부분은 감정적인 형태로) 드러냈다. 이 구분선 외에도 수많은 구분선이 존재했다. 단체에는 배우자가 유급노동을 하거나 부모와 함께 사는 이들이 많았지만, 3인 혹은 4인 가족의 외벌이인 이도 있었다. 유급노동에 대한 절실함은 각자의 행동에 한계선을 그어주었다. 복잡한 함수가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함께’인 줄 알았던 우리가 그토록 다른 존재라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교적 진보적인 교회를 다니며 배우자 역시 유급노동을 하던 나는 노조 설립에 적극적인 쪽이었다. 나는 미적거리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난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으므로, 대표의 성격과 성장배경을 분석하던 그 자세로 구성원들을 해부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온화한 A는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가는 회피주의자로, 이타적이고 책임감 넘치던 B는 도덕적 우월주의자로, 자학개그로 좌중을 웃기던 C는 자기연민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르시시스트로 머릿속에서 난도질당했다. 내가 좋아했던 이들의 면모가 참을 수 없는 무능력으로 재발견되었듯, 나 또한 재발견되었다. 나는 사람의 허위를 파악하는 것에 너무나 재빠른 사람, 내가 가진 한 줌의 지식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게 지긋지긋해질 무렵, 대표는 기습적으로 희의를 소집했다. 노조 대신 ‘평상근자협의회’를 설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중간관리자는 모두 제외되고, 협상력도 현격히 줄어든 반쪽짜리 노조였다. 우리에겐 그 안을 거절하고 새로운 안을 제시할 구심력도 동력도 없었다. 문이 열리고 내면의 모순이 드러나자, 내 옆의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단체 단톡방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