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윌리스, <학교와 계급재생산>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학업성취도가 최하위인, 절반 이상의 애들이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곳이었다. 학교에는 소위 말해서 ‘날라리’가 많았다. 교사의 권위가 미치지 못하는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고, 공부 잘하는 아이를 부러워하면서도 ‘범생이’라며 은근히 비하하고, 또래집단에서의 놀이, 장난, 유머, 추억 쌓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애들이었다. 교사가 아무리 혼을 내고 심한 경우 ‘싸대기를 갈겨도’(라떼는 그런 일이 왕왕 일어났다),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만드는 애들. (참고로 나는 그런 애들을 부러워하는 쭈구리였다.)
영국 노동계급 백인 남자 고등학생의 반학교 문화에 초점을 맞춘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시대도 인종도 다르지만 1990년대 서울 변두리 여고에서 마주쳤던 ‘날라리’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저항, 권위의 타도, 공식적인 것의 약점과 오류에 대한 비공식적인 간파, 그리고 전환과 기쁨을 만들어내는 독자적 능력 같은 것”(193쪽)…. 내 고등학교 시절 '날라리' 여고생과 다른 지점도 있다. 성적 욕구를 표출하고 요구하는 것에 대한 대범함, 우월감 같은 것들.
저자가 연구한 이 학생들은 ‘똑똑하다’. 학교의 공식적 목표에 따르지 않고 비공식적인 질서를 만들어가면서도, 공식적인 것과 정면대결해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공식적 차원과 비공식 차원이 돌아가는 과정을 파악하는 “이중적 능력”(81쪽)을 발전시킨다. 단지 공식적 차원과 비공식적 차원을 조율하는 ‘눈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모순을 “간파”하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 좋은 성적을 거두면 선분을 상승할 수 있다거나, 자격증이 좋은 직장을 보장한다는 등의 믿음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꿰뚫어 본다. 계급사회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지식의 본질을 간파하고, 개인으로서는 지위상승을 이뤄낼 수 있어도 계급이나 집단의 수준에서는 사회적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한다.
하지만 이 간파를 노동자계급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섣부른 찬양으로 연결해서는 안된다. 간파에는 언제나 “제약”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간파를 혼란시키고 방해하는 장애요소와 이데올로기적 영향이 존재하고, 이러한 제약 속에서 간파는 왜곡되거나 탈정치화된다. 간파와 제약의 상호작용 속에서, 노동계급 아이들은 지식의 계급적 기능을 꿰뚫어보고 정신노동을 거부하며 자발적으로 육체노동의 세계로 진입한다. 비록 그 세계가 대부분 저임금 비숙련노동인데다 노동자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체계 속에 있다할지라도. 왜 반학교 문화는 현실 세계의 부조리를 통찰하면서도 (기득권이 진입하기 꺼려하는 육체노동자의 세계로 자발적으로 진입한다는 점에서) 기존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되도록 도움을 주는 걸까?
(여기서 개념을 정의하고 가면, 간파는 “한 문화적 형태 안에 있으면서 그 구성원들이 처한 삶의 조건과 전체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꿰뚫어보려는 충동”, 제약은 “그러한 충동의 충분한 발전과 표출을 혼란시키고 방해하는 이런저런 장애요소와 이데올로기적 영향”, 부분적 간파는 “간파와 제약이 구체적인 문화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252쪽 참고)
저자는 이 제약을 만들어내는 “분리”를 설명하며, 회심의 카드로 가부장제를 꺼낸다.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인 가부장제와 정신/육체노동의 분리라는 두 구조 속에서 남성성은 육체노동과, 여성성은 정신노동과 결합한다. 육체노동이 남성다움의 논리로 미화되면서 “노동 바깥에서 노동의 의미를 채워”주고, 노동에 대한 불만이 정치적 불만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차단한다. 이들은 노동의 일반적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개별적이고 구체화된 노동에 대해 의도적으로 무심해진다. 어떤 노동이든 즐거울 수 없다고 생각하며, 노동 자체가 아니라 남성성과 강인함이라는 주제를 배우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가부장제는 옛날부터 지속되어온 관행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비록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노동력을 충당하고 사회질서를 재생산해나가는 복잡한 기제의 한 중심축이다.” (308쪽) (육체/정신노동의 분리, 가부장제 외에도 인종차별 역시 이 기제의 한 중심축이 된다.)
이들은 그놈의 남성성 때문에,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리한’ 직업 선택을 했으며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 남성성의 유리함 때문에, 다른 방면의 불리함을 받아들인다. 노동자계급의 반학교문화를 통해 그 저변에 있는 가부장제를 드러내다니, 탐복하며 읽었다.
또 하나 탐복했던 지점, 반학교 문화의 “침묵하는 중심”에 대해 파고들어가는 연구방법론. 반학교 문화에는 집단적 수준에서 나오는 어떤 창조성이 있다. “의식적으로 방향지어지지는 않은 집합적인 의지와 행동”(255쪽), “통찰”(256쪽), “유무형의 탐구의 결과”(256쪽)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이 집단적 창조성은 수수께끼 같다. 반학교 문화의 규칙은 구성원들조차 의식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언어로 표현하기도 힘들다. 애초에 부르주아의 것인 언어로 그 체제에 편입되지 않은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말들은 흩어져 있거나 상호 모순되고, 비공식 집단 바깥의 세계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하지 못해 자신을 공식적인 규칙에 대한 예외로밖에 설명해내지 못한다. 이 “침묵하는 중심”에 대해 접근해가는 저자의 자세에 탐복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가장 중심적인 준거점은 한 문화의 현란한 치장 이면에 없거나, 적어도 침묵하는 중심이다. (...) 바깥으로 드러나고 더욱 뚜렷하게 창조적이며, 다양하고 때로 뒤죽박죽인 특징들을 그 깊숙한 핵심에까지 파헤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어느 한 문화의 사회적 창조성을 이해하려면, 개념적인 관계의 핵심에 이르기까지 삶의 논리를 추적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과정은 어느 수준에서는 어떤 한정된 사회구조 내에서 창조성의 위치가 갖는 특수성을 인정하고, 그런 특수성에 따라 하게 되는 행위에 항상 관련된다.
폴 윌리스, <학교와 계급재생산>, 256쪽
이 책은 진보주의 교육 담론, 혹은 여기서 비롯된 여러 개혁적 시도들에 대해서도 통찰을 준다. 백인 남성 노동자계급 자녀가 자발적으로 노동자계급이 되는 과정에서 분석해야 하는 것은 공식적인 수업내용이나 취업지도가 아니라 반학교 문화인 것처럼, 어떤 문화의 공식적 수준뿐 아니라 실용적 수준, 문화적 수준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제도적인 목표도, 어떤 도덕적이거나 교육적인 계도도 뉴턴 역학에 비교하자면 문화 역학의 공간 속에서 애초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355쪽)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 모양인데 왜 변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왜 지배 세력에 협력하는가… 이 책은 그 주요 원인이 남성성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주장을 너무나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백인/남성/노동자는 계급적 타자인 자신의 위치를 사회변화를 위한 분노로 승화시키기보다 지배계급 남성과 동일시하는 근거로 삼는다. 자신이 ‘비록’ 노동자이긴 하지만, 인종적으로는 백인이고 성별로는 남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계급적 열등감을 이주민과 여성 노동자에 대해 배타성, 우월의식으로 보상받고자 한다.
마르크스 이론의 결정적 실패 중의 하나는 성별과 인종 개념의 부재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무엇으로? 남성은 미소지니(misogyny, ‘여성 혐오’)로 단결했지만, 노동자는 인종과 성별, 국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과 상호작용의 산물이지만, 작동 방식은 고착적이다. 남성 노동자, 중산층 여성, 유색인 부르주아는 모두 부분적인 결핍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인종, 성별, 계급(백인/남성/자본) 구조에 대항해 단결하면 좋겠지만 역사상 그러한 사례는 없었다. 1970년대 영국 이야기지만 영원한 함의가 있는 책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1562.html
정희진 선생님의 서평에 의지해 꾸역꾸역 읽어나갔지만, 결코 후회가 없는 책. 올 해의 책을 고르라면 <학교와 계급재생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