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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Oct 19. 2024

글쓰기에 적절한 거리두기는 어떻게 이뤄질까

신성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아이의 소아암 진단과 투병, 국회의원 보좌진이라는 저자의 이력, 돌봄을 정치와 연결지으려는 시도들. 이 책의 소개글을 보자마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펼치고 놀랐던 것은, 아이의 소아암 진단(2022년 6월) 후 출판(2023년 12월)까지 1년반 정도밖에 거치지 않았다는 점, 그럼에도 투병기가 (꽤 시간이 흐른 것처럼) 건조한 톤으로 거리를 둔 채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의 투병기를 읽을 때,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휴먼다큐 사랑>을 보는 자세를 취하기 쉽다. 작은 몸으로 위중한 병명을 짊어지고 어려운 수술과 치료를 감당하는 것만도 어른들의 눈물 버튼 아닌가. 고통의 경험을 쓰는 것이 모두 그렇지만, 특히 아이의 투병기를 쓰는 것은 자기연민 혹은 아이에 대한 연민으로 블랙홀처럼 빨려든다. 


저자의 글은 건조하고 담담하다. 아이의 투병기가 빠질 수 있는 블랙홀에 갇히지 않으려는 처절한 분투로 보일 정도로. 나는 거리두기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회고할 때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자는 현재진행형인 투병기 속에서, 어떻게 사건과 거리두기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이렇듯 사랑과 정치라는 일견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결합을 끝없이 시도하는 것은 사실 병원에서 익히게 된 내 나름의 생존법이다. 193쪽


이 책은 진단-치료-종결로 이어지는 투병 연대기가 아니라, 아이의 투병을 소재로 한 돌봄, 현대의학, 모성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사적으로 보이는) 사랑과 (공적으로 보이는) 정치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자신의 경험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과정이 되지 않았을까. 또 반대로 자신의 경험을 거리 두고 바라보면서 사랑과 정치를 결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시도들이 저자를 살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러한 시도에 공감하면서도, 독자로서 이런 마음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나는 저자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은데? 책 이야기나 국가가 이렇게 해야한다는 이야기 말고 당신 이야기를 더 해주면 안될까요?’ 언젠가부터 평범한 이들의 미시 서사가 각광받고 있지만, 이 서사들이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경쟁적으로 나열하는 것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안다. 글쓰기 플랫폼에서 인기를 얻는 작가들이 이런 걸 잘하는 이들이라는 것도. 이런 시대에 반감을 갖는다면서, 나 왜 이러는 거지? 관음증? 혹은 나도 모르게 <휴먼다큐 사랑>류의 서사에 익숙해진 것일까? 


음, 저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더 자세히 묘사해달라는 건 아니다. 이미 많은 기혼 여성들의 책이나 돌봄 관련 책에서 언급된 책, 이론, 주장 등의 이야기는 쳐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 "나의 적은 가부장제가 아니라 키치다"라는 문장처럼, 저자가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밀어붙여서 쓴 것들이 좋았기 때문에 이런 문장을 더 보고 싶었다. 


그는 알아야 했다. 그를 비롯해 이 시대 남자들의 돌봄에는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는 천편일률적이고, 현실을 외면한 채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그것은 키치다. 소도시 변두리에 느닷없이 들어선, 먼 나라의 르네상스 양식을 조야하게 흉내 낸 왕궁예식장 같은 키치다. 책에서 본 성평등을 흉내 내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 인간해방을 추종하고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가부장제인 가짜 성곽이다. (...) 돌봄의 현장은 어디나 처절하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똥기저귀처럼 추하다. 그런데 이 체험에 동참하지 않고 부정하며 아름다운 환상으로 돌봄의 정의를 새로 내리는 한국식 라떼파파의 태도가 바로 키치다. 

100쪽


병상 커튼 아래로는 늘 다른 이들의 발만 보였다.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보호자들의 발뒤꿈치는 그들의 일상처럼 푸석했다. 환자들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발자취가 없었다. 내 맨발을 보이는 건 또 그렇게 싫었다. 자기 전까지 온종일 양말을 신고 지냈지만 윤이를 재우려고 침대에 같이 눕거나 샤워실을 다녀올 때처럼 별 수 없는 순간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맨살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투시당하는 느낌이었다. 

132쪽


윤이나 준수, 제인이나 케빈이 아니라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 급성골수성백혈병, 수모세포종, 횡문근육종, 유잉육종, 골육종으로 존재한다. 윤이의 몸은 숫자로 조각조각 분절되고 형해화되어 떠다닌다. 차트에, 기계에, 데이터 안에 윤이가 있다. 윤이를 잃지 않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이곳에는 윤이가 없다. 부조리다. 물론 모든 부조리가 비극은 아니다. 현대의학에 노동은 있지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부조리는 비극이 된다. 그럴 때마다 병원을 서둘러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181쪽


글에서 소재와 거리두기는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실패다. 저자의 글은 냉정하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려다 너무 멀어진 건 아닐까? 하지만 담담하게 서술한 문장들을 타이핑하다가,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숨을 골랐다. 저자의 문장들은 거리가 먼 게 아니라, 오랫동안 삭히고 만진 문장이었다. 켜켜이 쌓은 시간과 감정과 생각을 밀도 높게 만져놓은, 징그럽게 멋진 문장들이었다. 


병실에 불이 꺼지면 좁은 침대에 누워 완전히 서로의 몸을 붙이고 얼굴을 쳐다봤다. 다른 환자에게 방해가 될까봐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처럼 일찌감치 잠자리를 준비했다. 잠들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을 아이와 짧게 얘기했다. 주로 내가 사과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그랬듯 아이는 다 받아주었다. 윤이는 언제나 나를 이해하거나 용서했다. 그리고 자기도 사과를 잊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매일 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일대일의 관계, 둘 간의 사랑과 믿음, 온전히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관계의 역사, 이것은 모성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한 시간 동안 극한의 고통과 온전한 행복을 동시에 느끼며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의 헌신은 모성 신화에 등떠밀린 것이 아니다. 나와 윤이의 사랑은 그렇게 전형적이거나 일방향적이지 않다. 내가 아이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 계산 없이 돌격하는 순정에 나는 내 시간과 자유를 기꺼이 희생한다. 여기에 굳이 이름을 붙이라면 의리 정도가 적당하겠다. 

48-49,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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