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 <다운증후군 아이가 찾아왔다>
울림을 처음 알게 된 건 몇 년전 격월간 교육잡지 민들레에 울림의 글과 나의 글이 나란히 실리면서다. 발도르프 어린이집을 고민하는 나의 글 앞에는 장애가 있는 둘째를 키우며 발도르프 교육 철학에 대해 느낀 그의 혼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후 그와 블로그 이웃이 되고 공부공동체 트러블에서 공부하며, 여러 시간을 함께 쌓아왔다. 울림의 책 <다운증후군 아기가 찾아왔다>가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으로 주문했다.
뱃속에서 장애를 알았으나 낳기를 결심하는 서사는 ‘장애를 알았음에도 아이를 낳는 훌륭한 엄마’의 이야기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울림 역시 자신의 이야기가 '좋은 엄마 판타지'로 포장될 것을 경계하고 있고,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장애가 있는 이가 태어날 권리를 둘러싼 논의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장애아를 낳은 후 울림이 맞닥뜨린 딜레마에 주목하고 싶다.
울림은 첫째를 철저한 발도르프 육아로 키웠다. 장애가 있는 둘째를 낳은 후 가장 괴로웠던 것 중 하나는 둘째를 발도르프식으로 키울 수 없다는 거였다. 발도르프로 대표되는 자연주의 육아의 세계와 재활치료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단순하게 말해, 자연주의 육아의 세계가 ‘너의 속도를 존중해’라고 말한다면, 재활치료의 세계는 ‘너는 의도적인 훈련에 따라 만들어질 수 있어’라고 말한다. 자연주의 육아 방침에 따라 첫째를 숲에서 뛰어놀게 하던 울림이 둘째를 치료실에 데리고 다니며 얼마나 많은 ‘현타’를 맞이했을지 눈에 선하다. 재활치료, 특히 울림이 묘사하는 물리치료는 아이의 대근육 발달을 위해 아이에게 힘든 자세를 시키고, 아이가 울어도 번쩍거리는 장난감이나 동영상으로 달래가며 같은 훈련을 반복한다. 울림은 ‘엄마가 치료를 늦게 시작해서’, ‘엄마가 집에서 운동을 안시켜서’ 등등의 말을 들을 때마다 빨리 재활을 다니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재활을 다니며 아이를 힘들게 한다는 죄책감도 느낀다.
(재활치료로) 고통스러워하는 꿈별이를 보면서 대체 걷는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아이를 힘들게 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꿈별이가 걷기를 바라는 건 내 욕심이 아닐까. 이제 막 세상에 온 아이가 바라는 건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놀면서 사랑받는 것일 텐데, 나는 왜 아이의 하루를 눈물과 비명으로 채우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모든 재활치료를 다 중단하고 싶다가도 “엄마가 치료를 너무 늦게 시작해서 아이가 느리다”거나 “엄마가 집에서 운동을 많이 안시켜서 발달이 느리다”는 의료진의 피드백을 들을 때면 종합병원 대기가 풀릴 때까지 손 놓고 집에만 있던 게 후회됐다. 치료 기회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과 아이를 아프고 힘들게 하고 있다는 이중의 죄책감이 매일 날 괴롭혔다. 181쪽
이 이중의 죄책감을 단순히 장애를 인정하지 못한 엄마의 한계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울림은 재활치료가 아이를 힘들게 한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장애인임에도 멋지게’ 사는 이들이 부럽고 내 아이보다 중증장애를 가진 아이를 보며 위안하기도 한다. (늘 느끼지만 울림의 글이 가진 매력은 자신의 모순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울림의 혼란은 비장애중심주의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주의 육아와 재활치료 중 한 가지만 영구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양육자의 딜레마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치료를 열심히 받아 장애를 극복하자는 환상에 동조할 수 없지만, 재활에서 배우는 기술이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치료를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다.
장애를 극복하라고 말하는 쪽에서는 치료를 열심히 해주라 하고, 장애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고 말하는 쪽에서는 엄마더러 공부하라고 한다. 치료에 매진해서 아이를 비장애인처럼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차별적인 사회를 바꾸기 위해 투쟁하라는 이들도 있다. (...) 정신없이 정보를 찾아보고 아이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녀서 기진맥진하면 또 비장애 형제에게 사랑과 관심을 줘야하며 집밥도 잘해줘야 한다는 조언이 쏟아진다. 172쪽
아이의 미래가 두려운 나는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멋지게’, ‘장애를 이겨내고 이렇게 훌륭하게’, ‘장애가 있지만 이렇게 행복하게’라는 서사를 쏙쏙 골라내어 취했다. 170쪽
내 아이보다 중증장애를 가진 아이를 보며 위안받을 때마다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져서 감사하는 게 아니라, 아이의 존재 자체에 감사하자고 매일같이 마음을 다잡았다. 검사 결과가 좋아서 기뻐하고 나빠서 실망하는 게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아이를 사랑하자고 되뇌었다. 85쪽
앤드류 솔로몬은 <부모와 다른 아이들>에서 자녀의 질병이나 장애를 둘러싼 두 개의 허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허구는 부모가 자녀의 질병이나 장애를 기적적으로 치료한 이야기, 두 번째 허구는 부모가 아이를 치료하려고 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전적으로 만족하는 이야기다. 앤드류 솔로몬은 결말에서 부모가 자신과 다른 아이들을 수용하는 것의 손을 들어주지만, 각각의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치료와 수용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치료 혹은 수용의 충동에만 이끌리기보다, 자신의 맥락 속에서 치료와 수용 사이의 복잡성을 외면하지 않은 채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울림 역시 장애 극복 서사와 장애 인정 서사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두 세계를 조율하고 있다. 발도르프 육아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지만, 자신이 터부시하던 육아의 세계에도 사랑이 깃들어있음을 깨닫고, 느린 둘째가 자신의 탓이 아니듯 빠른 첫째도 자신의 덕이 아님을 인정한다.
자연주의 육아를 하는 사람들이나 발도르프 교육 전문가들은 아이를 자연에서 자유롭게 움직에게 해줘야 하며 사랑과 따뜻함 속에서 자라게 해주라고 말한다. 그러나 병원에도, 치료실에도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다. 정말 놀라울 만큼 꿈별이를 사랑해주는 치료사들이 있다. (...) ‘장애 때문에 육아가 엉망이 됐어.’, ‘난 불행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관찰해보니. 치료실 스탠딩 기구에 묶인 채 서있는 아이들도 웃으면서 치료받는 날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삭막한 병원 빌딩 안에 입원해 있더라도 보호자가 있고, 정든 의료진이 있고, 온기를 나누고 같이 웃을 수 있으면 그 사랑이 아이를 키운다. 사람이 내뿜는 에너지는 답답한 치료실 안에서도 아이를 즐겁게 만든다. 153쪽
꿈별이를 낳고야 뼈저리게 느꼈다. 꿈별이의 장애가 내 탓이 아니듯, 고래의 빠른 발달과 영리함도 내 덕이 아니라는 것을. 꿈별이가 아무리 재활치료를 받아도 또래보다 느리게 자라는 것처럼 고래가 크는 속도고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일이다. 78-79쪽
울림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엄마 역할을 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엄마를 향한 요구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불가능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발도르프로 대표되는 자연주의 육아와 재활 치료로 대표되는 과학적 육아 모두 엄마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같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장애 극복 서사와 장애 인정 서사, ‘왜 치료에 더 힘쓰지 않냐’는 사람들과 ‘왜 치료를 그렇게 열심히 다니냐’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편만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울림은 두 세계가 교차하고 충돌하는 지점에 서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나는 그가 그려내는 이야기를 계속 읽고 들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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