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로부터의 자유> 마이클 가자니가
비영리 관련 수업 중 추천받은 책인데, 제목에 끌려 독서목록에 올려두었다. 쉽게 읽히지 않아 힘들었지만 뇌와 인간에 대한 설명이 신선했다. 저자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내 나름의 방식으로 그 의미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우리의 일상적 통념으로는 나의 '자아'가 내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지배자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백억 뉴런들의 집합체인 '뇌'가 존재할 뿐이다.
뇌는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전문화된 모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모듈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만이 우리 의식에 포착된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해보라. 뇌는 심장을 뛰게 하며 피를 순환시키는 동시에, 시각을 통해 도로 상황을 파악하고, 발로는 수시로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으며, 뒷좌석의 아내와 끊임없이 대화하게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동시에 의식적으로 행하지는 않는다.
'나'라고 하는 의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활동으로 인해 창발 되는 현상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뇌가 활동한다' 정도로 재해석할 수 있다.
그럼 '나'라는 의식과 정체성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아쉽게도 뇌과학이 모든 것을 밝혀내지는 못한 상황이다. 다만, 세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의식'은 뇌 활동을 통해 창발 되는 현상이지만, 뇌가 가진 자연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뇌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의식 혹은 정신을 동일한 원리로 설명해낼 수는 없다. 인간에 대한 설명이 곧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뇌에서 창발 된 의식, 정신이 다시 뇌에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둘째는 우리의 '좌뇌'가 가진 비밀에 있다. 좌뇌에는 뇌에 입력된 모든 정보를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해석기' 모듈이 존재한다.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는 이 모듈은 나의 행동을 설명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충동적 쇼핑/정치적 결정 등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도, 부조리한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내가 하나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이 해석기 모듈 덕분이다.
셋째는 '사회적 뇌'에 대한 것이다. 뇌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발달하며 진화해왔다. 우리가 가진 도덕적 관념이나 직관은 뇌가 가진 사회성에 기반하며 형성되었다. 이 사회적 뇌에 기반해 한 사회의 도덕률, 법, 제도 등이 형성되고, 이러한 문화가 다시 인간의 정신과 뇌에 영향을 미친다.
책은 계속해서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이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뇌와 그로부터 창발 된 정신,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그 역동성이 '나'라고 하는 존재의 본질이다.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행위는 '뇌'에게도, '정신'에게도, '사회'에게도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최근의 '뇌' 결정론에 반대하여, '뇌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본질적 속성을 '상호작용'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추구하며 나아가는 삶의 원리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는 부모와의 애착관계를 형성하며 상호작용을 시작하고, 청소년 시기에는 또래 관계와 이성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성인이 되어서는 사회적 환경과 관계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결혼을 할지, 자녀를 가질지, 어떤 동호회에 가입할지, 동문회에 나갈지 등등.. 수많은 사회적 관계들을 선택한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들에 노출되어 있고, 그 정보들 중 극히 일부만을 선택하여 받아들인다. 책, 티비, 인터넷 등 다양한 미디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을 확장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기르며 저마다의 가치관을 만들어 간다.
모든 사회문화적 환경으로부터 고립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상실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선택의 순간에 놓여있다. 누구와, 무엇과 상호작용을 할지 즉, 소통하고 공감하며 살아가야 할지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쌓여서 내 삶의 구체적 모습들을 형성한다.
결국,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내가 진정으로 소통하며 공감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누군가는 부모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종교지도자 또 누군가는 사회적 약자들이 공감의 대상일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이들에겐 주식시장이, 드라마가, 게임이 소통의 대상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특히 리더십이 누구와 소통하며 공감하는지가 중요하다. 지난 정권에서 벌어졌던 세월호 사건, 최순실 게이트 등을 보면 당시 우리 사회의 리더십이 국민들을 소통과 공감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곳은 정해져 있지 않다. 개인과 사회 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가운데 그 방향이 선택된다. 그리고 만약 그 방향을 바꾸고 싶다면, 새로운 소통과 공감의 상호작용을 일으켜야만 한다. 지난해 우리 사회가 보여준 광장의 문화가 그 대표적 사례다. 방향을 바꾸기 위한 국민들의 적극적이며 대담한 소통이었고, 그 소통은 정권 교체라는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만난 한 사람,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과의 교감을 통해 삶이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또는 우리의 삶이 변화되길 원한다면 어떡해야 할까? 지금까지와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물론, 다른 선택은 불안하다. 하지만 그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겐 '불만'만 남게 된다. 불만스러운 오늘로 남아 있을지, 불안하지만 새로운 내일로 나아갈지 그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오늘 내가 나누는 소통과 교감이 나의 내일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