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인데, 왜 눈치만 보고 살았을까?>

독서일기(2022.02.22. 일)

by 아가다의 작은섬

감사랑합니다

글로 마음을 나누는 상담사 아가다입니다


복지관에서 노인상담 전문가로 일한 지 세 달이 되었다. 내가 이 길로 들어선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처럼 삶은 배움의 연속이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또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노인’이라는 호칭은 사전적으로는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을 의미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는 듯하다. 나무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 고령화를 겪는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흐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실제 현장, 특히 노인복지시설에서는 ‘노인’이라는 표현 대신 존중의 의미를 담아 ‘어르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르신’ 역시 본래는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에서 비롯된 표현이라고 하니, 결국 우리는 ‘노인’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두고 여전히 조심스럽고도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있는 셈이다.


이것저것을 다 떠나, 분명 각자의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권처럼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지 않는 우리 문화 안에서는 상황과 관계에 따라 어떤 호칭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참 많다. 특히 나이와 위계,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는 말 한마디가 관계의 온도를 좌우하기도 하기에 더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이렇게 호칭 하나를 두고 서두를 길게 쓰는 이유도 결국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말이 가장 적절한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복지관에서 사용하는 표현을 따라 ‘어르신’ 또는 ‘회원님’이라고 부르려 한다.


여하튼 각설하고, 노인전문상담사로 일하게 되면서 노인상담과 관련된 책을 몇 권 구입했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니 노년을 대상으로 한 상담 이론서나 연구 저서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왜일까. 노년은 이미 삶이 정리된 시기라고 여겨서일까, 아니면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을 덜 주목받는 연령대이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상황에서 “노인심리상담 전문가가 전하는 심리 에세이”라는 문구에 이끌려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글씨체는 비교적 크고, 단락도 잘 나뉘어 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고, 덕분에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곱씹어 보기에도 좋았다.


책에서 발견한 두 문장은 유독 내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평생 ‘쓸모’로만 자신을 정의했던 사람”(102p), 그리고 “바빠야 살 수 있고, 쉬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62p)라는 문장이었는데, 마치 나의 아버지 세대를 그대로 설명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한 시대를 살아낸 많은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쓸모 있음’으로 증명해야 했고, 쉬지 않고 움직여야만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문장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쓸모로만 규정해 버리는 순간, 인간 그 자체는 사라지고 기능만 남게 된다. 역할이 곧 존재가 되고, 생산성이 곧 존엄이 되어버리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는 곧 가치가 사라진 시간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늘 바쁘게만 살아왔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쉼’이라는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낯설고 두려운 공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방식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그들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뎠을까.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다시 정의했을까. 그리고 나는 그 나이가 되었을 때 과연 다를 수 있을까. 나 역시 지금의 역할과 성취로 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따라온다.

쓸모로 정의해 버린 삶은 노년의 여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일이 줄어들수록, 역할이 사라질수록, 존재마저 작아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년의 위기는 단순히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한 생애를 쓸모 있음과 생존해야 함에 대부분의 시간을 써버린 이들에게 노년은 어쩌면 처음으로 기능이 아닌 존재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어르신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주름 사이로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지난 세 달 동안 만난 회원님들 역시 몸에는 분명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생생하고 젊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현재의 나를 떠올렸다. 몸은 계속해서 늙어가지만, 내 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악동 같은 기질과 순수함, 철없이 맑은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어른이라 불리지만, 내면에는 여전히 아이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언제나 ‘어른다워야’ 하고, 그 기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금세 나잇값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어쩌면 이것이 나이 듦을 두려워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글쓰기 수업에서 작가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술집 옆 테이블에서 모임을 하던 한 어르신이 건배사를 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했다.


“너희는 늙어봤냐? 우리는 젊어봤다.”


그래,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 저 한 문장 안에는 지나온 시간에 대한 자부심과, 세월을 통과해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인 선생님은 또 다른 말을 건넸다. 노인은 단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나는 노인을 모든 상실(고통)을 살아낸 사람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상실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은 이미 충분히 가치 있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더 긴 삶이 나에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런데도 상담실에 앉은 그들이 자신의 삶이 허무하다고 말할 때면, 나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순간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이 올라오고, 자연스럽게 아빠의 얼굴이 마음 한편에 떠오른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세대와 다르지 않게 사랑이 있고, 슬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배움이 있고, 다툼이 있고, 성장도 있다. 오히려 더 오래 사랑했고, 더 깊이 아파봤고, 더 많이 견뎌냈을 뿐이다. 결국 그들도, 그리고 나도, 그저 시간을 통과해 온 같은 인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