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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미상 Aug 14. 2020

인어공주와 이웃나라 공주

그날 밤, 그녀들만 아는 이야기




인어공주는 불꽃놀이가 한창인 배를 해변가에서 바라보았다. 선상 위에서 쏘아 올린 폭죽들은 밤하늘을 황홀하게 밝혔다가 어두운 바닷속으로 삼켜지듯 사라졌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모습이 마치 내일의 자신 같아 인어공주는 더욱 심란해졌다.



'오늘 밤, 그를 찌르지 않으면 물거품이 된다.'



 머리를 잘라낸 언니들의 당부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들에게 머리카락은 해류의 방향과 물살의 세기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매우 중요한 부위였다. 인어들의 머리카락은 자라는 속도가 매우 느리기에 아마 한동안 그녀들은 헤엄을 예전만큼 자유롭게 치지 못할 터였다. 집에는 무사히 돌아갔으려나. 걱정 어린 시선이 문득 먼바다로 떨어졌다.


그녀의 손에는 언니들이 머리카락과 바꿔 온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검은 진주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초승달 모양의 산호칼.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장식품은 아니었다. 인어공주는 손잡이 끝에 새겨진 문어 마녀의 표식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금기가 떠올랐다. '다리 달린 것과는 무엇도 주고받지 말라.' 문어에게 받은 다리였든 인간에게 주고만 마음이었든, 금기를 깬 벌은 이미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와 있었다.


내가 왕자를 찌를 수 있을까. 내일이면 그는 결혼식을 올린다.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 인어공주인 것을 까맣게 모르는 왕자는, 가장 행복한 날을 앞두고 결국 다시 은인에게 목숨을 잃을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 운명의 장난 속에 폭죽이 될 것은 그일까, 나일까.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절망에 처한 내 심정과는 반대로 행복에 겨운 그의 모습을 마주한다면, 어쩌면 울컥하는 심정으로 저지를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피로 두 다리를 적시면, 그는 사라지고 나는 남겠지. 죽음으로 되찾을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파티가 끝난 듯, 배에는 잔잔한 수면 등불만이 어른거렸다. 그녀는 달의 위치로 시간을 가늠해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바다가 이른 해를 토해내기 전 결정해야만 한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자 불 같은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다리를 달게 된 이후로 줄곧 느껴오던 고통이었지만, 유독 통증이 지독하게 발목을 잡아채는 기분이었다.








선실에서 가장 깊은 방. 짙은 나무 냄새와 옅은 포도주 향이 감도는 그 방 안에, 왕자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옆에 누워있던 공주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필 눈을 감은 그 모습이,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을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바다에 빠져 의식을 잃고 있던 아름다운 얼굴. 그때 그냥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이렇게 죽도록 괴로운 순간은 오지 않았겠지.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지만 손에서 자꾸만 힘이 빠져 단도가 떨어지려 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보려 애쓰던 그때였다.



"왔군요."



너무 놀라 칼을 던지듯 떨어뜨리고 말았다. 숨을 들이키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갤 돌리자, 이불 위의 산호칼을 주워 들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곤히 잠든 줄로만 알았던 이웃나라의 공주였다. 해가 뜨면 그의 아내가 될 여자. 그녀는 인어공주의 황망한 눈길을 말없이 받아내며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내내 의아했어요, 당신 눈빛과 행동들. 그러다 오늘 파티 시작 전에 사라진 것을 알고 짐작했습니다."



공주는 조각상처럼 굳어있는 인어공주의 곁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섰다. 그녀의 손에 들린 조각칼이 창 너머 달빛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는 듯 반짝였다. 인간세상에선 눈에 띄도록 이질적인 물건. 그녀가 산호칼의 진주를 세듯 손끝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나는 해양국가의 공주입니다. 어릴 적 말과 함께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다와 관련된 전설들이죠. 그러니 당신이 누구인지 모를 수 없지요. 고향을 물었을 때 가리키던 바다. 서툰 걸음걸이와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미소. 인간의 말은 하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눈.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이 지난번 바다 폭풍에서 왕자를 구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그는 당신이 그를 구해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내가... 그를 구한 것을 알고 있다고? 파도에 흔들리는 잔 속의 술처럼, 인어공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인간 세상의 일이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리가 하는 것은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이고, 그것은 두 나라와 국민들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인어에게 화가 미치면 인간에겐 더 큰 화가 닥친다는 사실이지요.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아무 반응을 보이지 못한 채 공주가 한 말을 되새기고 있는 인어공주를 두고, 공주는 문득 손에 쥔 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간절함과 혹시나 하는 심정이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를... 죽여야 하나요?"



인어공주의 눈이 다시 한번 크게 휘청이는 것을 공주는 놓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인어공주의 두 다리는 이미 지느러미로 바뀌어 있었다. 와인을 뒤집어쓴 듯 피로 붉게 물든 채 덜덜 떨고 있는 인어의 실체를 목격한 공주도 차마 놀란 기색을 감추진 못했다. 공주는 충격에 빠져 크게 열려있을 뿐인 인어공주의 눈을 말없이 마주 보다, 이내 단호하게 돌아서서 바다 쪽으로 난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모든 것이 느린 듯 빠른 듯, 시간의 흐름에 어긋난 것처럼 일어난 일이었다.



"어차피, 그이는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그도 기꺼이 이렇게 했을 겁니다."



공주의 손에 들린 단도 끝에는 아직 왕자의 피가 맺혀 있었다. 놀란 인어공주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자, 공주가 그녀를 부축해 창틀 위에 앉혔다. 그녀가 뒤집어쓴 왕자의 피 냄새를 맡은 듯, 창 너머의 끈적한 바닷바람이 커다란 상어처럼 창틀을 넘어와 방안을 비릿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두 여인의 틈새를 비집고 왕자의 고통 섞인 신음이 길게 늘어졌다. 인어공주는 저도 모르게 창틀을 움켜쥐고 돌아보았다.



"그는 내가 살릴 겁니다. 이번엔 내가 살릴게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당신과 그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어서 가세요, 기다립니다."



마지막 말에야 겨우 왕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인어공주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수면 위로 짧은 머리 그림자 다섯이 떠있었다. 그녀들의 동생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하면서.

직감적으로, 인어공주는 이것이 마지막인 것을 알았다. 창문에서 몸을 던지기 전, 인어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 돌아본 것은 왕자가 아닌 공주의 얼굴이었다.



"......"



입을 뻐끔댈 뿐이었지만, 공주는 입 모양 만으로도 정확히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인간의 말을 배운 이후, 인간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말. 결연하던 공주의 낯빛이 그녀의 입술을 읽어낸 순간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인어공주가 바다를 깨며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공주도 쓰러지듯 창틀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공주의 시야에 불현듯 빛과 피에 물든 산호칼이 들어왔다. 바다 생물의 눈동자처럼 붙은 검은 진주들과 눈이 마주친 공주는, 방금의 일들을 던져버리듯 곧바로 인어공주의 뒤로 그것을 던졌다.








작은 산호칼은 바다에 빠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제 쓰임을 마친 산호칼은 바닷물이 닿자마자 방대한 물방울을 내뿜으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 밤에 누군가 깨어 우연히 그 모습을 목격했다면, 인어가 바다에 몸을 던지자 물거품으로 변해 사라졌다고 이야기할 법한 신비스러운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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