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이 Dec 15. 2020

같아져라, 사랑하고 싶다면.

<더 랍스터> (The Lobster, 2015)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 오로지 커플에게만 허용되는 사회, 짝을 잃고 호텔로 이송된 자는 45일 안에 새로운 짝을 찾아야 하고, 그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본인이 선택하는 동물로 변하게 된다.
- 골프, 수영 등 혼자 하는 운동만이 허용된다. 테니스, 배구 등 타인과 어울리는 종목은 불가하다.
- 커플의 삶에 관한 긍정적 인식을 주입하는 교육을 매일 받아야 한다.
- 호텔 측에 의해 매일 의무적으로 성적 자극을 받지만 스스로 그 욕구를 풀어서는 안 된다. 만약 자위행위를 한 것이 발각되면 손을 토스트기(...)에 넣는 형벌에 처해진다.
- 거짓으로 관계를 꾸민 자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동물로 변하는 처벌을 받는다.



위의 해괴한 규율들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짜놓은 '더 랍스터'의 세계관이다. 근시라는 결함 탓에 아내에게 버림받은 데이비드(콜린 파렐)은 위의 비인간적인 규칙들에 지배받는 호텔로 향하게 되고 45일간 자신의 짝을 찾으려, 혹은 만들어내려 노력한다. 커플 혹은 솔로, 이성애 혹은 동성애(양성애는 금지이다). 44 반 사이즈 따위는 없이 오로지 44와 45 사이즈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이 지극히도 이분화된 사회에 대해 감독은 별다른 설명을 않는다. 매우 전체주의적으로 보이는 이 규칙들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러한 비상식이 어떻게 용인될 수 있는지 이해시키는 과정을 생략하는 대신 흥미로운 세계관과 더불어 도대체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없는 더욱 흥미로운 그 구성원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거부감은 제하고 몰입감은 더하는 방식을 취한다.





부조리를 기반으로 이분화된 금기의 환경에 속하는 인물이라면 흔히 선택의 여지에 놓이기 마련이다. 순응할 것인가, 반기를 들 것인가. '더 랍스터'가 보여주는 이들은 순응하는 수동적 인물이다. 물론 호텔의 비인간적인 규칙을 거부한 이들은 있었다. '외톨이'로 명명된 자들이 그러했는데, 이들은 인위적인 사랑을 거부하여 목숨을 걸고 호텔을 탈출한 뒤 숲에서 숨어 사는 산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이 이룩한 사회 역시 구성원에게 또 다른 규칙을 강요한다. 호텔과 대비되는 숲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 사랑은 허용되지 않는다. 서로 사귀거나 스킨십을 나눌 시 엄한 처벌이 따른다. (예를 들어 키스가 발각되었을 시 '레드 키스'라는 이름의 처벌 하에 입술을 베어버린다.)
- 인물 간의 대화는 가능하되 불순한 의도를 담은 플러팅은 절대 금지. 함께 춤추기도 금지.
- 철저한 혼자만의 삶이 강요된다. 가령 죽을 위험에 처한다 해도 도움 없이 스스로 헤쳐 나와야 하고, 그러지 못했을 때 본인이 묻힐 무덤 역시 스스로 파 두어야 한다.



전자 못지않게 엄격한 룰은 이곳 역시 호텔에 버금가는 살벌한 세계임을 보여준다. 강제성을 피하기 위해 도망쳐 왔으나 다시금 또 다른 규율에 묶인 사람들. 이들을 부조리를 깨는 혁명적인 인물이라 보기는 어렵다.


영화가 중반부에 다다를 즈음 외톨이를 이끄는 대장(레아 세이두)는 '거사'라 명명한 일을 치르기 위해 총과 호텔방 열쇠를 입수하고 소수 정예의 인원을 준비시킨다. 이를 보며 관객은 이 세계관을 고분고분 따랐던 수동적인 인물들에게서 처음으로 혁명의 씨앗이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폭력을 통해 호텔이라는 표면적 장치가 부수어짐으로써 누군가를 필시 사랑해야만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 부조리의 종결을 무심코 기대한다.


그러나 외톨이 일당은 총알 한 발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단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부당한 시스템을 직접 없애는 대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을 죽이는 편을 택한다. 짝이 없으면 동물이 되어야 하는, 즉 배우자의 유무에 의해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갈리는 사회 안에서는 그 어느 것보다 효과적인 파괴의 방법이었을 테지만 그들은 더 나아가 부조리의 추방까지는 닿지 못한 채 다시 숲에 돌아와 은둔하는 생활을 이어간다. 이들의 거사를 혁명이라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감독은 이어지는 결말부의 전개를 통해 왜 혁명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아이러니 그 자체를 표상하고자 한 인물 데이비드는 사랑을 강요받던 공간에서는 정작 사랑을 찾지 못하다 사랑을 금지하는 곳에 이르고서야 그토록 찾던 사랑에 빠진다. 이분화된 공간인 호텔과 숲, 그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그들은 마치 대립을 초월한 중립적 공간처럼 보이는 도시로 탈출을 계획한다. 도시는 실제로 그들이 연기라는 명목 하에 유일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역경을 딛어 끝내 닿은 도시에서도 그들은 행복할 수 없었다. 사랑을 핍박하던 공간에서 벗어났는데도 말이다. 이는 불행의 씨앗이 호텔과 숲이라는 외적 압박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했음을 드러낸다.




같아져라, 사랑하고 싶다면.


데이비드가 처음 호텔에 도착해 안내사항을 전달받는 순간부터 영화의 엔딩까지, '공통분모'는 사랑의 필수 요소로서 끊임없이 소개된다. 사랑에 실패해 동물로 변했을 때조차 그 짝으로는 반드시 공통점 있는 동물을 찾아야 한다는 호텔 주인(올리비아 콜먼)의 대사는 영화의 끝까지 관철되는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주인공 데이비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 모두가 공통분모를 사랑의 필수적 기반으로 두는 인물들의 관념을 비꼬고자 되풀이되는 반복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모든 인물들은 앵무새마냥 '공통점'만을 되뇐다.


호텔에서의 경험을 생각해보자. 주인공의 최측근이었던 친구 존(벤 위쇼)은 등장인물 중 결핍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자 결핍을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절름발이로 살아온 그는 무엇보다도 충족과 안정(두 다리)를 원하고, 어머니를 잃어본 경험 탓에 짝을 구하지 못했을 때의 처벌을 극도로 무서워한다. 그런 그조차 공통점이 없다면 사랑할 수 없다 말하며 새로운 사랑을 이루기 위해 평생 일부러 코피를 내는 삶을 택한다. (물론 그 거짓말은 얼마 가지 못하지만 말이다) 공통점을 추구했을 때의 비극적인 결말은 주인공 데이비드 역시 경험한다. 그는 사랑하기 위해 비정한 여자(앙겔리키 파풀리아)와 억지로 공통점을 찾으려다 형을 잃는다.


후반부에 소개되는 여자(레이첼 와이즈)와의 사랑에서도 공통분모에 대한 집착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사랑은 '근시'라는 출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잡은 토끼를 선물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던 데이비드는 자신처럼 그녀에게 토끼를 선물한 다른 이를 쫓아가 집요하게 그가 근시인지를, 즉 그녀와 공통점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마침내 근시가 아님을 확인했을 때 그는 그가 경쟁자가 아님을 알고서 마음을 놓는다.

사랑하는 그녀의 눈이 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데이비드는 슬퍼하거나 마음 아파하는 기색보다는 '방법이 있을 거야'라고 말하지만, 그 방법이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닌 '더 사랑할 수 있을 방법'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는 혈액형, 좋아하는 과일, 연주할 수 있는 악기와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등을 집요하게 캐물으며 어떻게든 다른 공통점을 찾으려 애쓴다. 안타깝게도 근시 외에 그들의 공통점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사랑 역시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기에 그는 도주를 결심한다.


따라서 숲과 호텔이라는 단순한 두 공간의 의미에만 중점을 두고 관람한다면 영화는 급속도로 납작해진다. 그들의 사랑을 속박했던 것은 호텔과 숲이라는 공간적 요소가 아닌, 같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강박 관념에 있었음을 영화는 꼬집고 있다. 그들이 사랑을 하도록, 혹은 하지 못하도록 옥죄고 억압하던 것은 내면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던 동일성이라는 단단한 벨트였다. 관념의 영향력 아래 사고를 잃은 무력한 인간상. 포커스를 맞추어야 할 것은 여기에 있다.



"왜 내 눈을 멀게 한 거야? 그를 멀게 할 수도 있잖아."



시각을 잃은 근시 여자가 대장에게 묻는다. 그녀의 말대로 두 사람이 사랑하고 있음을 눈치챈 대장이 그들에게 내린 처벌은 각각 다르다. 왜 여자에게서는 시력을 앗아간 반면 데이비드에게는 무덤을 파게 한 뒤 그 안에 묻는 시늉을 했을까? 두 사람의 처벌이 바뀔 수는 없었을까? 이는 열어놓은 결말에 대해 감독이 남겨놓은 힌트가 될 수 있다.


대장은 리더다운 예리한 통찰력으로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알아챘다. 데이비드는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가장 중심에 둔 인물이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가 치근덕대는 것조차 제대로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는 종종 과감하게 비인간적 행위를 저지르는데, 이러한 결정적 행동들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는 비정한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 꽤 오래 그녀의 행동을 꾸준히 참아낸다. 무려 그녀가 본인의 형을 죽였다는 사실을 마주한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려 안간힘을 쓴 바 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거짓을 알아채고는 '당신을 신고해 누구도 원하지 않는 동물로 변하게 하겠다'라고 선언하자 곧 그녀를 공격하고 죽일 마음을 먹는다. 또한 데이비드는 혀짤배기 남자 로버트(존 C. 라일리)의 어쩔 수 없이 너를 쏘아야 한다는 말을 듣자 신의를 저버린 채 그를 기절시키고 옷을 빼앗기도 하고, 외톨이의 대장 역시 숲을 탈출하기 위해 그녀가 자신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던 방법을 그대로 갚아주며 살해한다. 이 모든 여정은 그의 행동력이 본인의 존속을 위협당할 때 발휘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며,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생존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도 강한 그의 면모를 드러낸다.


반면 근시 여자의 가장 큰 갈망은 공통점을 가진 이와의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녀는 데이비드가 본인과 같은 근시였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었고, 따라서 시력을 잃자 그와의 사랑 역시 포기하고 동료로서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가 시력을 잃은 직후 데이비드가 온갖 질문을 던지는 장면은 처음으로 두 인물의 욕망이 어긋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남자는 자신이 근시이기 때문에 사랑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다른 공통점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그의 행위에는 사랑 그 자체에 대한 갈망보다는 사랑의 상실로 인해 함께 잃게 될 온전한 인간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그의 두려움이 끝내 시각을 포기하려는 무모한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대장은 거사에서 그러했듯 가장 효과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꺼뜨렸다고 볼 수 있다. 눈을 멀게 한 뒤로는 더 이상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더 이상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덤에 묻히는 시뮬레이션을 실행함으로써 남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자각시키고, 여자에게는 둘의 공통점인 근시를 없애버린다. 만약 데이비드의 시력을 없앴다면, 영화의 엔딩에서 그 대신 스테이크 칼을 들고 거울 앞에 섰을 여자는 망설임 없이 시력을 포기한 뒤 다시금 그와 사랑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여자가 화장실에 간 데이비드를 한없이 기다리는 장면에서 영화를 끝맺음으로써 관객은 데이비드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무엇보다도 본인의 온전한 생존을 갈망하던 데이비드가 과감히 함께 시력을 포기했다 예상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매우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엔딩크레딧의 끝부분에 삽입된 파도 소리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의 참 정체성을 다시금 강조한 뒤 끝내 완전한 사랑을 찾는 데에 실패한 그가 바다로 돌아갔음을 암시해 주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더 랍스터'는 초반부와 중반부에 걸쳐서는 매우 친절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세계관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관객이 궁금증을 품을 법한 요소들을 지체 없이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호텔까지 데려온 개의 정체, 존의 다리에 관련된 이야기, '과녁이 커플이 아니라 한 명인데는 이유가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대사 등등 영화는 관객이 궁금증을 오래 끌고 가지 않도록 멀지 않은 곳에 설명을 심어 두었다. 이는 매우 여러 번 반복되어 다소 강박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럼에도 몇몇 부분은 설명을 통째로 생략하는 불친절함을 보이는데, 이로써 '더 랍스터'는 영화적 공백을 몹시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데이비드가 비정한 여자를 어떤 동물로 변하게 만들었는지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궁금증을 유발함과 동시에 그의 분노와 혐오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상상하게끔 만들고, 또한 숲에서 타인과 섹스할 시 처해지는 '핏빛 관계'라는 처벌의 내용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 몸서리쳐지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극도로 확대시킨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을 설명하지 않는데, 이 공백을 남겨둠으로써 관객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고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주인공 커플이 어떻게 되었을지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 상상하고, 심층적으로 나아간다면 공통점에 기반을 둔 사랑의 결말에 대해 능동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공통점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 그와 함께 증발해버릴 사랑의 위험성에 대해.


'맞지 않아서 헤어졌다'라는 결별 사유는 실은 우리에게도 꽤 낯설지 않다. 이렇듯 '더 랍스터'는 다소 극적인 전개가 더해지긴 했으나 종종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연상되게 만드는 부분이 존재하는 영화다. 근시라서, 수학 실력이 부족해서 등등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연인에게 버림받는 사람들. 외톨이들의 표본이자 홀로 서는 삶을 가장 강하게 주도하고 강요하는 대장조차도 부모님 앞에서는 좋은 직장을 다니는 척 쇼윈도 부부 행세를 하고, 연인들은 실제 여부와 관계없이 남들 앞에서는 너무나 행복한 척, 뜨겁게 사랑하는 척 보여야 한다.


이렇듯 우리의 사회와 닮은 조각을 가진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풀어가던 감독은 가장 중요한 부분에 공백을 남겨둠으로써 우리에게 생각할 여유를 열어두었다. 무엇보다도 감정적 행위라 칭할 수 있을 사랑에서조차 관념의 영향력 아래 무력하게 휘둘리는 인간상을 신랄하게 꼬집으며 말이다.




원문 :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12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