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e 3호 <동심> 원고
"너 이러다간 나중에 정말 호더로 살아!"
대청소 날, 잔뜩 화가 난 엄마가 날린 경고 겸 저주다. 온화한 성품의 엄마로 하여금 막내딸에게 격한 폭언을 퍼붓게 한 것은 바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나의 다소 호더스러운 특성이었다. 호더(Hoarder)란 물건을 비축하고 저장하는 데에 강박을 지니는 이들로, 축적된 물건으로부터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내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사람을 뜻한다. 엄마는 내 물건들을 하나하나 판결대에 올리고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의사봉 삼아 각각의 남은 수명을 판결했다. "중학교 기술 가정 교과서? 다시 볼 일이 있을 것 같아? 이건 뭐야, 라이터? 다 쓴 거 아니야? 예뻐서 간직한다고? 너 말이야, 화성인 바이러스인지 뭔지. 아무튼 거기서 쓰레기 쌓아놓고 살던 사람 기억 안 나니? 이대로 가다간 너도 금방이야." 도무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잔소리는 중학생 시절 좋아하던 애가 선물했던 초콜릿의 포장 박스가 등장하자 엄마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래도 깔끔하게 정리하여 보관하지 않았냐고 나름 항변해 보았으나, 그녀는 더는 말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며 반쯤 썩은 얼굴을 하고 내 방을 떠났다.
다행히 무언가를 버리는 행위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가득 차 있는 물건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내 공간을 빼앗기는 수준의 저장 강박까지는 아니다. 두고 보면 분명 어딘가 쓸 데가 있을 거라 아득바득 우기며 합리화하는 단계도 아니라서 버릴만한 물건인지 아닌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능력도 아직까지는 남아 있다. 다만, 추억이 깃들어 있는 물건을 버리기가 조금 힘들 뿐이다. 초등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몰래 공책을 찢어 킬킬대며 주고받았던 쪽지라던가, 아르바이트에서 매일같이 달고 다녔던 명찰이라던가. 유치원생 때 안고 자던 인형 등등……. 물건 자체에 집착한다기보단 그 물건에 쌓여 있는 시간을 잘 놓아주지 못한다.
이러한 저장 욕구가 단순히 물건에 국한된 건 아니다. 특히 문화를 향유하는 부분에서는 거의 사이버 공간이라는 구천을 떠도는 망령 수준이다. 과거보다 퀄리티 높은 신곡을 훨씬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요즘 같은 때에도, 카페 마감 아르바이트를 할 때의 노동요는 반드시 3세대 아이돌 노래여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비슷한 맥락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신인이 쏟아져 나오는 연예계에서도 이미 전성기가 한참 지난 '구오빠'들을 붙잡고 쉽게 놓지 못한다. 이제 사랑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는데도, 그저 그들을 열렬하게 사랑했던 과거의 '나'를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거다. "이때 좋았지... 진짜 행복했는데..." 하면서.
과거 지향형 인간. 언젠가 나는 날 그렇게 명명했다. "시간 진짜 빠르다. 벌써 그게 그렇게 오래됐어?"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고, '지금의 이 순간도 무시무시하게 빠르게 지나가 곧 과거가 되겠지'라는 생각에 쓸쓸함을 담는 사람. 따지고 보면 그리워하는 시점이 아주 먼 과거도 아니다. 불과 몇 년 전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요즘 같은 경우는 2019년을 그리워하는 중인데, 또 막상 그 당시의 나는 2017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몇 년 후에는 필시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을 그리워할 거라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특성은 아마도 미성숙에서 비롯된 책임 회피 및 결여와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모든 보호막에서 쫓겨나 곧 사회에 내던져질 어른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은 피터팬 콤플렉스. 앞으로의 인생보다 지나온 과거가 더 행복할 것 같고, 반복되는 일상은 지루한데 또 미래는 막막하게만 보이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순간에 대한 아쉬움에서 나오는 일종의 거부감이 아닐까.
그런데 최근의 어느 날, 엄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다가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상하네,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엄마가 툭 던진 그 한 마디는 무의식 깊이 침잠해있던 나의 옛 기억을 깨웠다.
사실 나의 동심은 어른의 삶을 선망하는 마음이었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설렘을 누른 채 애써 잠자리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처럼, 어릴 때는 분명 하루하루가 기다려졌고 어서 훌쩍 커서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의 미래에는 찬란한 사건들이 촘촘히 수놓아져 있을 것 같다는 신나는 예감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행복과 뿌듯함이 몰려왔었다. 빨리 입학하게 해달라고 수도 없이 떼를 썼던 초등학교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 깊게 들이마셨던 나무판자의 냄새를 기억한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기억을 되짚자 신선하고도 놀라웠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허무맹랑한 바람은 미성숙하다는 점에서 무심코 아이의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정작 어렸을 적 나의 동심은 그 반대인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니. 그리고 약 스무 해 만에 그 동심을 이렇게 완전히 잃을 수 있다니.
수많은 영화 중 픽사의 <업>(2009)을 골라 나의 동심과 연결 지은 까닭은, 영화의 주인공 칼이 나의 동심과 정확히 반대되는, 즉 현재의 나와 꼭 닮은 과거지향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를 끌어당겼던 포인트는 오프닝 시퀀스 도중 칼이 짓는 어떤 표정이었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성인 관객의 경계심, 즉 '보러 와 앉아있긴 하지만 행여나 내 만 원 남짓 되는 돈과 두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은 어른들의 의심을 사르르 녹임과 동시에 칼의 지난 생애를 함축적으로 제시하는데, 그의 삶은 오로지 아내 엘리와의 로맨스로만 온전하고도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칼과 엘리는 앞니 빠진 아이 시절에 만나 삶의 마지막까지 평생을 함께한다. 탐험가를 꿈꾸던 두 꼬마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파라다이스 폭포에 함께 갈 것을 약속하지만, 현실의 여러 문제에 부딪혀 그 약속은 점차 뒤 순서로 미뤄지기를 반복한다. 어느 날 집 청소를 하던 칼이 파라다이스 폭포 그림을 보고 문득 과거의 약속을 떠올리지만, 어느덧 노년에 접어든 엘리는 이미 많이 늙고 약해져 있다.
이 순간 칼이 짓는 표정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분명 곧 가려고 했었는데.' 불과 얼마 전의 기억 같은 일들이 까마득한 과거로 멀어져 있을 때의 '아차' 싶은 후회와 마치 더 남은 기회는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점철된 얼굴이다. 칼은 지금이라도 약속을 지키려 부랴부랴 비행기 표를 장만하지만, 슬프게도 이미 쇠약해진 엘리는 곧 세상을 떠나고 만다. 불안이 결국 현실이 된 것이다. 장례식에 쓸쓸히 앉아있던 칼이 집으로 돌아가 문을 잠가버리는 것으로 오프닝 시퀀스는 마무리되는데, 그의 얼굴은 짙은 상실감과 후회로 그늘져 있다. 칼은 폭포처럼 쏟아졌던 시간을 멀뚱멀뚱 흘려보낸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평범하기 그지없을 상대가 사랑이라는 옷을 입고서 당신에게 가장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하던 때를 생각해 보라.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건 마치 젠가의 조각을 빼내듯 그이의 존재만 쏙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특별했던 그는 당신의 삶 이곳저곳에도 자신의 특별함을 묻혀두었기에, 사랑했던 이가 사라짐과 동시에 그와 나누었던 당신의 모든 일상은 무너져 내리게 된다. 몇 년의 연애도 그러기 마련인데, 일생을 함께 지내 온 노부부는 어떻겠는가. 평생 화려하고 다양한 넥타이를 자랑해오던 칼은 아내를 잃은 뒤부터 잿빛 보타이만 맨다. 물론 침울한 마음 때문도 있겠지만, 한 번도 스스로 넥타이를 매 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정하게 넥타이를 매주던 건 언제나 엘리의 몫이었으니.
그렇게 전부를 잃은 칼은 과거지향적 인간으로 돌변하고, 물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묻은 물건이라면 모두 아내의 생전 그대로 보관하는데, 그 영향으로 칼은 곧 집 자체를 엘리와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엘리와의 추억이 깃든 집은 칼에게 단순히 물질적 의미를 지니는 대상이 아니다. 종종 말을 걸고 고민을 털어놓는 모습으로 알 수 있듯이 칼에게 집은 엘리 그 자체이고, 놓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자 추억을 의미한다.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파라다이스 폭포에 집을 가져다 놓을 것'이라는 모험의 목적 역시 엘리를 데려가고픈 그의 진짜 욕망이 투영된 부분이다.
그러나 현상을 유지하고픈 칼의 바람과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는 혹독하게 그를 압박해오고, 결국 재개발을 이유로 집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칼은 엘리와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뒤늦게나마 모험을 실행에 옮긴다. 바로 비행기도 비행선도 아닌 수많은 풍선을 타고 남아메리카로 날아가는 것. 물론 감동적인 오프닝으로 마음이 말랑하게 녹아버린 관객에게 '집이 전깃줄에 걸려서 떨어져 버리면, 혹은 너무 높이 올라가 녹아버리면 어떡하지' 싶은 어른의 걱정들은 이미 의미를 잃은 상태다. 그저 함께 날아다니는 집을 타고 픽사가 정교하게 짜 놓은 세계 속으로 즐겁게 빨려 들어가면 그만일 테다.
이 영화에는 칼과 마찬가지로 지난날에 묶여 사는 과거지향적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하는데, 바로 칼과 엘리의 우상이었던 탐험가 찰스 먼츠이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누렸던 명성과 사랑에 집착하며 그것들을 되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점에서 분명 비슷한 특성을 지닌 두 사람이 각기 빌런과 주인공이라는 다른 결말을 맞게 되는 결정적인 까닭은 칼에게만 주어졌던 행운에 있다. 칼은 운이 좋게도 과거를 바라보고 떠났던 모험에서 미래를 만난다. 바로 말 많고 탈 많은 아시아계 꼬마 러셀, 사람의 말을 하는 강아지 더그, 그리고 신비로운 도요새 케빈이다.
떠오르는 집에 몰래 올라타 모험의 동반자가 되었던 러셀은 존재 자체로 미래와 맞닿아있는 어린아이다. 티 없이 순수하고 언제나 희망에 차 있는 미래지향적 소년은 의심 없이 모두를 친구로 삼으며 선하게 행동하려 애쓴다. 더불어 말하는 개 더그는 서열이 강한 개들의 사회를 거스르고 기존에 존재하던 권력에 반항하는 캐릭터로, 이러한 친구들과 함께 케빈을 도움으로써 훗날 칼은 찰스와 자신의 헛된 희망, 즉 과거를 움켜쥐려 애쓰는 것은 가능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결말을 알 리 없는 초반부의 칼에게 이들은 그저 목적을 방해하고 귀찮게 따라붙는 존재일 뿐이다. 결국 그는 소중한 집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서 찰스에게 케빈을 넘겨주는 선택을 한다. 어른이라면 아직 보내지 못한 각자만의 소중한 '집'이 하나쯤은 있을 테니 칼이 왜 집을 포기할 수 없는지, 왜 케빈 대신 불타는 집을 구하러 달려갔는지 관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이 망가졌을 때 그가 속상한 마음에 낸 모진 역정보다는 그 한편에 자리 잡은 상실감에 더더욱 마음이 쓰일 테고, 한껏 불편한 마음을 안은 채 친구들과 맞바꾼 집을 끌고 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마냥 어리석다 욕할 수만은 없을 테다.
마침내 폭포에 집을 데려다 놓겠다는 목적을 이룬 뒤 칼은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해보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집의 내부, 즉 목적의 본질은 이미 망가졌을뿐더러 남은 것은 모험을 떠나기 전 느꼈던 공허함뿐이다. 집에 집착하던 행위는 그가 과거에 매몰되어 똑바로 앞을 내다볼 수 없게 했다. 이 순간 칼이 탈피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은 엘리가 남긴 노트의 몫이다. <업>은 '내가 할 일', 즉 미래로 가득 채워진 엘리의 노트를 빌어 지금껏 장장 한 시간 반을 달려온 이유인 메시지를 전한다. '당신과의 모험 고마웠어요. 이젠 당신만의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요.' 과거로부터 눈을 돌려 앞을 바라보아야만 새로운 모험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그리고 인생의 모험이 반드시 대단하고 스펙타클한 일로 채워질 필요는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피트 닥터 감독은 인터뷰에서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매일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들이라 언급한 바 있다. 영화가 담고 있는 이러한 메시지는 픽사의 최근작인 <소울>(2020)이 주었던 감동과도 일맥상통한다.
뒤늦게나마 참된 가치를 깨달은 칼은 미뤄두었던 청소를 시작한다. 집을 띄워 날아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그는 아내의 흔적이 잔뜩 묻은 물건들을 내다 버리고, 끝내는 그토록 아끼던 집까지 하늘 밑으로 던져 버린다. 구름 밑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집과 작별하는 칼의 표정에 관객은 가슴이 미어진다. 저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래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즉 엘리를 파라다이스 폭포에 남겨두고 돌아옴으로써 칼은 새로운 미래와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집을 버린 덕분에 찰스의 멋들어진 비행선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삼을 수 있었고, 러셀의 아버지 대신 졸업식에 참석해 엘리의 배지를 선물함으로써 잃었던 가족이자 친구, 반려동물을 얻었다. 상실했다 생각했던 것들은 칼보다 더 일찍 도착해 미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로 숨어버렸던 이가 삶을 새로이 짓는 이야기, 그 과정에 스며드는 동심의 작용. 모든 픽사 애니메이션이 그렇듯 <업>은 아이만을 위한 동화가 아니다. 집을 떠나보내고 비행선으로 갈아탈 용기를 가지라는 말은, 어쩌면 나처럼 닳고 닳은 과거지향적 어른에게 더 필요한 잔소리일지도 모른다. 물론 날아가는 풍선 집에 눈물을 훔치는 엄마 아빠를 보며 아이들은 의아할 테지만.
더는 무언가가 쓰일 일이 없을 것 같던 일기장의 뒤 페이지, 즉 미래가 칼이 모르는 새에 그간 쌓였던 일상의 시간에 의해 서서히 채워지고 있었던 것처럼 나의 미래 역시 그러하리라 믿는다. 또한 놓아주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자리를 찾아갔던 칼의 집처럼, 집착을 버림으로써 나에게 소중한 과거의 기억들은 돌고 돌아 어딘가에 정착할 것이다. 어쩌면 미래의 언젠가에서 또 다른 형태로 다시 마주할 수도 있겠다.
호더의 삶을 피하고자, 과거를 향해 꼿꼿하게 굳어져 있는 고개를 어렵사리 돌려 앞으로의 탐험으로 채워나갈 '내가 할 일' 리스트에 집중하리라는 결심을 해본다. 나의 동심이었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동심을 간직한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돌입해야 하는 일은, 바로 잔뜩 밀려 있는 24년 치의 대청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