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이 Feb 27. 2020

누구 하나 외롭지 않도록

<윤희에게> (Moonlit Winter, 2019), 임대형 감독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원치 않았던 이별 이후 이십 년 간 애써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쥰(나카무라 유코)에게서 아직까지도 가끔 자신을 그리워한다는 편지를 받은 윤희(김희애). 영화는 쥰의 편지로 막을 열어 그에 대한 윤희의 답장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위 대사는 마지막 윤희의 편지에서도 마지막 줄인 추신의 내용이다. 차마 본문에는 쓸 수 없었으나 전해야겠는 그 애틋하고도 절절한 마음이 가득 담긴 이 추신은 관객이 영화의 마지막까지 꾹꾹 잘 쌓아두었던 감정의 둑을 무너뜨리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윤희에게>는 인물에 대한 감독의 세심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영화로 곳곳에서 그 따스한 배려를 찾아볼 수 있다. 두 주인공인 윤희(김희애)와 쥰(나카무라 유코)은 과거 받았던 박해와 핍박으로 인해 더 이상 선뜻 마음의 문을 열고 나갈 수 없는, 다소 수동적이고 제 자리에 멈추어 있는 인물들이지만 영화에는 그들의 만남을 위한 장치가 존재한다. 바로 행동하고 움직이는 인물, 새봄(김소혜)와 마사코(키노 하나)이다. 두 사람에 의해서 편지가 발송되고 수신되었기 때문에 영화는 따듯한 결말을 맺는다. 만약 마사코가 부치지 않았다면 쥰의 편지는 지금껏 그래왔듯 언제까지나 그녀의 방 안에만 자리하고 있었을 테고, 또 만일 편지가 새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윤희에게 가 닿았다면 내성적인 윤희는 좋지 않은 형편과 새봄의 존재를 이유로 자신의 부족한 용기를 합리화하고 오타루로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윤희와 쥰의 마음이 연결되어 닿을 수 있도록 그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에도 역시 영화의 배려가 묻어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새봄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또 그것이 부모의 이혼 사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새봄은 다소 무심하다 느껴질 정도로 평온하게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는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는 사실이나 그녀는 쥰과 윤희의 마음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마사코 역시 쥰의 편지를 읽은 뒤 어떠한 말이나 물음도 없이 그저 행동으로 옮겨주었을 뿐이고, 후에도 윤희와 새봄의 재회를 적극적으로 돕고 나선다. 준에게 다가가는 새로운 인물인 료코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쥰이 동성애자일까?’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보편적인 이성애적 관계에서 볼 수 있듯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지에만,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호감을 표현할지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을 보인다. 플러팅으로 알려져 있는 ‘오늘 달이 참 예쁘네요.’ 와 같은 대사를 보았을 때 만약 쥰이 도중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이렇듯 현실에서는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을 영화적 배경으로 설정한 임대형 감독의 배려 덕분에 두 인물은 오롯이 자신들의 감정에 집중하여 관계를 쌓아 나가고, 관객들은 그 두 주인공의 감정과 로맨스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즉 <윤희에게>는 단순히 윤희와 쥰이 그간 사랑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 얼마나 더 힘들어야 만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퀴어 연인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헤쳐나가야 하는 장벽을 전시하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퀴어 로맨스라는 장르에서 퀴어가 아닌 '로맨스'에 방점을 찍은 영화이자 뒤를 돌아보는 영화가 아닌, 앞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영화이다.



영화에서 따듯한 결말을 맺는 것은 두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쥰과 윤희의 징검다리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낸 새봄, 그 감동적인 재회를 홀로 묵묵히 바라보던 그녀는 마치 퍼지는 사랑의 기운에 물들기라도 한 듯 지금껏 틱틱대며 다소 정없이 굴었던 남자 친구 경수(성유빈)에게 처음으로 달콤한 입맞춤을 선물하고, 심지어 윤희의 전 남편(유재명)까지도 새로운 인연을 만나 외로웠던 과거를 딛고 나아간다. 영화는 마치 한 명이라도 외롭게 놔둘 수 없다는 듯이 모든 인물을 보듬고 어루만진다.





먼저 다가가 안아주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선 채 팔을 벌려 기다려주는 고모처럼, 영화 <윤희에게>는 따듯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위로를 남긴다. 두 주인공은 그저 재회했을 뿐 어떤 미래도 기약하지 않았기에 로맨스의 전형적인 행복한 결말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저 존재 자체로 쓸쓸한 이들에게 담백한 위로가 되는 영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