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생각들 #1
“여자 선수가 세운 기록이 스포츠의 성격 상(?) 남자 선수 기록에 미치지 못할 때 ‘여왕’으로 표현하는 것도 PC하지 못한 표현인 걸까?”
어느 날, 한 동기가 단체 카톡방에 올린 질문이었다. 그는 정말로 스포츠의 성격을 고려했을 것이다. 여자 선수의 기록이 절대적으로 남자 선수 기록에 미치지 못하므로, 이 종목의 실제 왕은 남자 선수이고 따라서 왕이라는 표현은 쓸 수 없다고 그는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립적인 단어에 굳이 성별을 표시한 '여왕'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는지 질문을 던졌다.
언뜻 들으면 그의 말이 논리적인 듯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남자 선수의 기록이 여자 선수 기록에 미치지 못할 때 ‘남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록 경기에서 신체 조건에 의해 남자 선수들의 기록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양궁이 대표적이다. '양궁 여제'는 흔히 쓰이는 단어다. 반면 양궁 남제, 양궁 남왕이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여자 선수가 남자 선수보다 더 과녁 중심에 가깝게 명중시켰더라도 말이다.
결국 동기의 질문은 실제 기록이 높고 낮음을 떠나, 어떤 고정관념의 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왕=남자라는 고정관념. 왕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성별은 그 어디에도 규정돼 있지 않다.'군주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 또는 '일정한 분야나 범위 안에서 으뜸이 되는 사람이나 동물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왕의 사전적 정의다. ‘일정한 분야나 범위’를 생각한다면 여자부와 남자부로 나눠 경기를 치를 경우에는 더더욱 여자 왕, 남자 왕이 당연히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여자 양궁 선수들은 여전히 '태극 낭자'로 불린다. 낭자는 '처녀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다. 남자 양궁 선수들은 '태극 전사'로 호명되는 것과 대비된다. 2020 도쿄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2021년에도 이런 일이 난무한다. 전사는 ‘전투하는 군사’라는 중립적 단어인데, 여자 남자 혼성 부문 모두 금메달을 휩쓴 선수들 중 누구는 전사이고 누구는 낭자인 걸까. 선수들을 '태극 낭자'로 일컫는 캐스터와 함께 중계를 하던 여성 해설 위원이 ‘우리 궁사들’이라고 고쳐 말해주는 것을 들었다. 해당 캐스터가 그 사실을 인지했을지 궁금하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의 사고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반대로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성평등 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면 할수록 그의 사고는 거기에 갇히고 말 것이다. 기사를 쓸 때 단어에 많은 고민을 기울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특히 ‘여성적’이라거나 ‘남성적’이라는 단어로 개인의 특성을 표현하지 않는 게 나 스스로의 약속이다. 강하다, 부드럽다, 굳건하다, 유연하다, 거칠다, 섬세하다 등 어느 한 성별에 국한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단어는 많다. 이런 작은 실천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깨달음으로 가닿는 날도 오겠지.
동기의 질문에 답을 할지 말지 망설이던 찰나, 다른 동기의 속 시원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PC하지 못한 게 맞으니까 정 여왕이라고 쓰고 싶으면 그냥 퀸이라고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