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표정을 듣는 일에 대하여
좋아하는 일은 ‘듣기’, 잘 하고 싶은 일은 ‘쓰기’. 사회인이 된 후에는 드문 일이지만, 나를 소개할 일이 생기면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내가 가진 직업, 기자로서의 나를 소개하기 위한 문구다. 타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건 묵직한 책임이 뒤따르지만 즐거운 일이다. 그 마음을 글로 잘 풀어내는 건 언제나 잘 해내고 싶은 바람으로 가득하다.
이 문구는 직업과 무관한 나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음악을 듣는 일’은 언제나 내게 제일 좋아하는 첫 번째 일이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귀도 열리는데,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세상에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너무나도 많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나는 오래 오래 살아서 이 음악들을 다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다 보면 잘 하게 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음악을 듣는 일도 잘 하게 될까? 음악을 들으면 어떤 음을 누르고 있는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나, 소음으로 가득 찬 곳일지라도 한 줄기 음악을 듣고야 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음악을 잘 듣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레슨 선생님은 매번 ‘듣는 숙제’를 내준다. 스케일이나 보이싱 같이 기술적인 면을 의무적으로 연습하라고 하기보다는, 곡을 열심히 듣고 오라는 게 선생님의 스타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의 추천곡은 재즈가 아니었다. 오래된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제곡. 이탈리아 작곡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대표작 중 하나다. 재즈가 아닌데 대체 왜 들으라고 하는 건지 궁금해하던 내 마음의 소리가 읽혔던 걸까. 선생님은 음악의 서정성을 느껴보라고 했다. 이런 음악도 재즈를 연주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런 음악을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요.”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음악을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난 경험, 나에게 있었나? 세상 모든 이별 노래가 내 이야기가 되어 들을 때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 적은 있지만, 그 때의 눈물은 노래의 가사 때문이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도저히 울음을 참을 수 없는 ‘대사’를 만날 때처럼. 그러니까 내 감정을 흔든 건 음악이라기보다는 문자였던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내게 음악을 잘 듣는다는 건 사실 ‘청음’을 의미했다. 코드는 무엇인지 어떤 보이싱을 눌렀는지 듣자마자 알아차리는 음감을 가진 사람들이 음악을 잘 듣는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온전히 마음으로 담아내고 느낀다는 게 잘 듣는다는 의미가 될 거라고는 상상해보지 못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들으라는 건 음악적 기술에 집중하라는 게 아니었다. 오롯이 음악의 표정에 귀를 열어보라는 의미였다. 미소를 짓고 있는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재즈 레슨에서 내주는 숙제도 음악의 흐름을 귀와 몸으로 스미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물론 연습이 동반돼야 하지만, 몸에 스민 음악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 동안 하루 종일 음악을 듣는다고 자부해왔는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잘’ 들은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엔 음악을 그저 배경음악으로 두고 다른 일에 집중했던 것이다. 망치로 두 대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재즈는 연주자의 취향에 따라 하나의 원곡을 자유자재로 다시 그려나갈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재즈로의 ‘편곡’을 그저 장르를 자유롭게 변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원곡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 맞는 음악을 다시 써 내는 것이라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그러니 지금도 역시 나는 좋아하는 일은 ‘듣기’, 잘하고 싶은 일은 ‘쓰기’인 사람이다. 음악의 표정을 듣고, 피아노로 잘 써보고 싶은 사람. 작곡가가 아니더라도 잘 쓰게 될수 있을까? “선생님 저 이 솔로 만들 수 있을까요? 못할 것 같은데요”라는 말에 선생님은 이렇게 힘을 준다. “그럴 리가 없어요. 지금까지 들은 음악이 얼만데, 뭐라도 당연히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