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대로 나를 낳아놓고선 잘도 그런 소릴 하시겠다?
제목은 내가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던 소리, 소제목은 우리 아들이 말을 유창하게 할 줄 알았더라면 내게 외쳤을 법한 소리다. 또한 내가 엄마에게 뱉었던 말이기도 하고, 제목 또한 엄마가 내게 되돌려 주었던 말이기도 하다. 낳음 당해봤고, 낳아 본 자로써 양쪽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 네 말도 맞다. 듣고 보니 네 말도 옳다. “
그래그래 너도 고충이 있겠지. 태어난 지 26개월 된 작은 인간도.
생각해 보면 예전의 나는 참 잘도 도망을 갔다. 직장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맞서거나 내 입장을 피력하기보다는 ‘이까짓 곳, 내 시간과 에너지 써서 바꾸면 뭐 해. 바뀌지도 않을 거고, 차라리 더 나은 곳을 찾는 쪽이 빠르겠지.’라고 잘도 합리화하며 꽁무니를 뺐다. 만나는 사람이 내 기준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고, 그게 반복이 된다면 거리를 두었다. 완전히 끊어내기 어려운 관계라면 텀을 늘리다가 결국엔 그 사람에게서 서서히 잊히는 방법을 썼다. 도망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당시에 나는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방법을 어느 정도는 고수하고 있기도 하고. 그러다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24시간 종일 근무 후에도 퇴근시켜주지 않는, 새벽에도 수없이 소환해 대는 상사를.
퇴근도, 퇴사도 용납되지 않는 이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줄행랑이 특기인 나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심지어 상사는 말을 못 한다..!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나는 그 어떤 회사를 다닐 때보다 눈치가 늘었다. 항상 비슷한 톤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으면 요구하는 것이 매번 다르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도 모르고, 오직 나만이 안다. 그렇기에 동료는 나와 연차는 같지만 대체로 나의 지시를 따르는 입장이 되었다. 그렇게 만 2년 정도 지나니 어리바리하던 동료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제 몫을 한다. 물론 아직 한참 멀었지만.
이 매거진 이름이 ‘나와 내가 선택한 가족들’이었던가. 너무 오랜만에 들춰보았더니 꽤 생경한 문장이 되었다. 내가 선택한, 선택한. 남편은 내가 선택한 것이 맞고, 지금은 천국에서 아픔 없이 쉬고 있을 우리 강아지도 내가 선택했던 것이 맞고, 그럼 내 아들은? 내가 선택했다고 볼 수가 있을까? 아이를 낳는 것을 선택하긴 했는데 말이지.
행위는 내가 선택한 게 맞으니 아들도 내가 선택한 사람으로 치기로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는 하지만 그래도 꽤 맘에 드는 구석이 많은 사람이니까. 이러다 나중에 턱이 거뭇거뭇해질 무렵 즈음에 “날 낳은 건 엄마 아빠의 선택이었잖아!”라고 외치면 그때는 좀 억울할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바락바락 대드는 놈이 아들로 나올지 몰랐지 인마! “ 하고 싶어 지려나. 학창 시절 저따위 말을 아빠에게 자주 뱉었던 것 같은데, 아빠는 감사하게도 저런 말로 응수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겠다.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주어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어쩌면 자식뿐이지 않을까 싶어서.
부부로 사는 건 하루하루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이 사람과 사는 것은 오로지 내 선택에 따른 결과였다. 언제든 나는 이 사람과의 혼인관계를 종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고. 물론 그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났다? (복중 태아에게도 일부 해당 되겠지만 차치하고, 일단 태어났다고 치자.) 그럼 그 순간부터 나는 엄마고, 죽을 때까지 종료할 수 없다. 죽어서도 마찬가지겠지. 또한 이건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역할이라는 점이 또 다른 내 역할인 ‘딸’이라는 역할과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때로는 진짜 다 벗어던지고 도망가고 싶은 때도 있지만. 주로 아이가 30분 간격으로 깨던 시기의 새벽에 그랬다. 근데 벗어던지고 싶다고 해서 벗어지겠나. 2년 반이라는 시간을 고민하고 낳았지만 그마저도 너무 짧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다. 아무튼.. 사직서를 낼 수도 없지만 내밀더라도 평생 수리가 안된다고 봐야 한다. 차라리 내가 낳은 이 아이를 수리하는 편(?)이 빠를지도.
오랜만에 빨래, 설거지,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닌 다른 일을 하니 괜히 마음이 설레고 그런다. 낳음 당해서, 내 성에 찰 정도의 역할을 부모가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억울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내가, 아이를 낳고 조금 다른 시선으로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보게 되니 문득 기록하고 싶어졌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그런 묵은 감정들이 다 해소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조금은 알겠다. 반대로 더욱 시리고 원망스러운 감정이 들 때도 있고. 그럴 땐 고개 한번 젓고 다시 눈앞의 아이에게 집중하곤 한다. 꼬리를 무는 감정들로부터 또다시 도망가본다. 평생을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치다 보니 결국은 이 작은 아이 앞이었다.
글을 너무 오랜만에 쓰다 보니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하늘에서 자신의 부모를 선택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아이에게는 고맙고, 내 부모가 덜 원망스러울 것 같기도 하다. 내 마음 편한 게 제일이니 뭐. 이제 나는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니 또다시 고개 한번 젓고, 거실 한편에서 바닥에 주스를 뿌리고 있는 저 아이에게로 가봐야겠다. “으휴. 누굴 닮아 이러니!” 하면 “엄마. 엄마.”하고 말대꾸하는 작은 사람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