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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진 Jun 02. 2018

분노와 증오의 사회

우리는 돌아올 수 없을 지점을 지나고 있는가


 향할 곳 잃은 분노와 증오가 유령처럼 떠도는 사회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수화기 너머로 상상도 할 수 없는 폭언을 쏟아내고, 아르바이트생이 영어로 대답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고 싶냐'며 횡포를 부렸다는 갑질 일화 같은 것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해를 거듭할수록 고삐 풀린 듯 치솟는 임대료는 어쩔 수 없는 시장 논리인 데다, 딱히 현실적으로 건물주에게 맞설 방법도 없으니 별 수 없는 일이지만, 시급 오백 원만 올려 주면 안 되느냐는 아르바이트생의 나지막한 말에는 '너 같은 미친 X은 본 적이 없다'며 고래고래 악을 쓰는 것이 한국 사회다. 그뿐인가?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의 아이들이 급식 카드로 프랜차이즈 돈가스를 먹으러 온 걸 보고 '기분을 잡쳤다'며 가게 주인에게 항의하는가 하면, '보육원 신발장에 브랜드 신발이 있으니 후원하지 않겠다'는 천박한 이들이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별, 세대, 직업, 이념, 자본 등 편을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갈라 친 뒤, 입에 담지도 못할 혐오 발언을 쏟아내 온갖 흉악한 언어들로 규정짓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거리로 뛰쳐나와 분노와 증오를 타인에게 강요하고 전염시킨다. 이렇게 사회 각계에 극단주의와 혐오주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이들끼리 서로 물어뜯으며 괴물이 되어버리고 있는 사이, 영악한 이들은 배후에서 이 광기를 교묘하게 조장하여 이익을 취하고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다져가고 있다.



 일례로, 근래 많은 언론이나 오피니언들이 격렬한 성 갈등 이슈에서 촉발되는 명백한 폐단들까지 맹목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옹호하려 드는 것은, 그것이 무슨 숭고한 신념이나 인류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자신들의 정치적 스탠스와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에 적잖은 도움이 되기에 그럴 뿐이다. 공공의 적을 만들면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용이하고, 증오는 사랑만큼이나 광기에 닿아 있는 격정激情인지라 인간을 추동시키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요긴하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예전만큼 '빨갱이'를 위시한 매카시즘의 논리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남자 편을 들고 여자 편을 드는지를 세력화하여 새로운 정치공학적 시스템에 편입시키려 하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는데, 바로 여기에 분노와 증오를 촉매로 사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SBS < 백종원의 골목식당 > 19화 방영분 캡처

 어느덧 첫 방영을 시작한지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매 방영 분마다 뉴스 기사는 물론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캡처 이미지가 올라오고, 온갖 격론이 벌어지는 등 화제가 끊이질 않는 TV 프로그램은 또 어떤가? 일단은 기본적인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가 있는지라, 부분적으로 훈훈하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꼭 복장이 터지게 하는 출연자들도 빠짐없이 섞여 있는데, 이는 여기에 일련의 불순한 의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 시청자들은 안일한 태도로 장사에 임하는 불량(?) 출연자들을 향해 '어떻게 저렇게 인생을 날로 먹으려 드냐'며 분개하고, 참다못해 화를 내고 쏘아붙이는 백종원 씨를 보면서는 '저러다 성격 버리는 것 아니냐'며 걱정을 한다.  푸근한 인상을 보여주면서도 관록 있고 냉철한 외식 사업가의 면모를 보여주던 그였던지라,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을 보면서 오죽 못난 사람이면 저 모양일까 생각하며 혀를 차기도 한다. 여하튼 매 회를 거듭할수록, 어쩐지 제작진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상당 부분 각본에 의해 연출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방송은 누가 거짓을 덜 말하고 있느냐의 차이뿐이라지 않던가. 갈등 구조를 통해 어떤 극적인 효과를 얻어보려 한 것임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런 의도를 구현하는 수단 자체가 추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애초에 시청자들은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분개할  따위가 하등 었다. 불쾌감유발하는 못난 사람들을 왜 억지로 봐야 하는오히려 의문을 품을 법했다. 백종원씨가 진정 도와주어야 할 이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열의를 다하는 성실한 사장들지, 몇 번 헛디뎌도 완충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배 부르고 철없는 사장들에게까지 솔루션을 제공하고 홍보해줄 이유는 는 것이었다.


 사실 그동안 제작진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매 회 논란이 되면 좀 어떤가? 화제가 되고 시청률만 견인할 수 있다면, 백종원 씨가 성격을 버리건, 출연자들이 어떤 비난을 받건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게 방송계의 생리다. 어찌되었건 이 프로그램이 2년을 넘도록 순항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아닌 게 아니라, 불량 출연자들의 수준이나 빈도가 개선되기는커녕 항상 비슷하거나 오히려 악화되고 있지 않은가? 이는 그저 이 프로그램이 노골적으로 자극적인 요소에만 천착하려 한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이 과정에서 '골목 상권을 살린다'라는 모호한 의도마저 온 데 간 데 없게 되었음은 덤이다. 가게 열 개가 새로 생기면 열두 개가 문을 닫는다는 치열한 한국의 자영업 세계에서, 수준 미달의 경영자가 분에 넘치는 지원 받, 실제로 막대한 물질 이득을 취하는 '그림'은 대중들로 하여금 공연한 분노와 질투를 조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으로 실로 불건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겠으나, 제작진들입장에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다. 하지만 이처럼 갈등과 혐오로 밥을 벌어먹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윤리과 도덕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게 된 광기의 사회이기에 가능했던 바라고 할 수 있다. 돈만 긁어모을 수 있다면, 이 아귀다툼의 지옥도에서 서로 물어뜯고 죽이는 일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어째서 한국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여러 아카데믹한 분석을 통해 접근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당장 와닿는 핵심적이유를 거칠게 꼽아 보자면, 그것은 바로 '살기 팍팍하기 때문'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이 말에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 하나를 근거들어보자면, 한국 사회는 미국의 총기 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도 자살자 수가 많을 만큼 곯아 있는 사회라는 점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 '팍팍함'의 근거로 삼기엔 지나친 비약이거나 비관론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한국 사회의 수많은 폐단들을 함축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인간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고통의 원인을 반드시 어디에선가 찾으려고 한다. 그래야 고통이 다소간 경감되고, 어느 정도 합리화할지언정 현실을 수용해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보려고 하니, 잘 찾아지지가 않는다. 분명 꽤나 노력도 했고, 특별히 죄지은 것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는데 어째서 자신이 이 정도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당연히 화살을 외부로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나 때문이 아니라, '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 정말로 그러한지의 여부는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이 고통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당장 손에 잡히고 눈에 들어오는 범위 안에서 찾아내야만 한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부정적 상념, 분노와 증오가 피어난다.

  


 과거 독일에서 나치즘이 어떠한 사회적 배경에서 태동했고 휘몰아쳤는지를 되짚어보라. 현실의 불합리와 고통이 방향을 잃은 채 무차별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그 사회가 극도의 혼란과 폐단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것이 계속 해소되지 못하고 곯게 되면, 나치 독일이 그러했듯 이를 되려 기회로 삼아 종국에는 어떤 하나의 희생양을 규정하고 광기로 결집하여 폭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작금의 한국 사회는 바로 그러한 결말에 이르는 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격동의 역사 속에서, 피의 대가를 치르며 문명 사회를 건설한 소위 선진국들조차도 장기적인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자 합리와 이성에서 멀어지고 급격히 우경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라. 분노와 증오를 속에 품고 삭이다가, 끝내 견뎌내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고, 간신히 외부로 돌려낸다그 때는 타인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인 병폐는 일개 개인이 어찌 감내할 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이 어긋난 흐름을 바로잡아 낼 수 있을까? 거대한 인류사의 수레바퀴에서, 그 어떤 인간도 결국엔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에 불과했으니 섣불리 낙관도, 비관도 하기 어렵다. 그러니 그저 광풍에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단단히 버티고 서 있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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