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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진 Jul 28. 2018

'운'에 관한 고찰

 혹은 푸념


 살다 보면, '나는 역시 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사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알게 모르게 과거에 작은 행운들이 가득했었다 해도, 굵직한 일이 아니면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하게 운이 좋았던 경우가 아니고서야, 통상 그 반대의 경우가 인생의 궤적에 더 선명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을 불운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데에 더 익숙하고 자연스럽지, 행운아라고 칭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 이유로,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기억하고 있지 못할 뿐 운이 좋았던 날도 많았을 것이고, 어찌 되었든 이렇게 오늘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확실히 섣불리 행·불행을 논하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 못한 일인 듯했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낙관론(?)이 때로는 부질없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운이라는 것은, 온전히 한 인간의 생애에 국한되어 완전히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바이다. 다른 사람들의 운이 좋건 나쁘건, 그것이 자신의 인생과는 이렇다 할 연관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타인의 행운이 자신에게 악영향을 끼치면 끼쳤지 도움이 되는 경우는 존재하기 어렵다. 누군가 10을 얻으면, 반드시 또 다른 누군가는 10을 잃어야 하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불행이라는 것은 온전히 그 당사자에게만 주어지는 절망이며 시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러한 사념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쉬이 사람을 잠식한다.

 게다가 이 운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궂은 것인가 하면, 인간이 고통을 덜어내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인 '남 탓'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일을 능력이 부족해 그르치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건 능력 부족 탓으로 돌릴 수 있고, 무엇보다 문제의 원인을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 자양분으로 삼고 차차 고쳐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실패의 원인이 운에 있었다면? 어디에 하소연할 곳조차 없다. 분명 인간의 일이지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버린 셈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온전히 화살을 자신의 심장으로 향하게 하고, 남김없이 받아내고 견뎌내는 수밖에 없게 된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라는 말만 되뇌면서.


 그뿐인가? 운이란 매 순간이 독립 시행되는 확률의 문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흔히 '도박사의 오류'라고 일컫는 논리의 문제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소리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못한다. 아무리 이전까지 운이 나쁘기만 했었다고 한들, 그게 앞으로는 운이 좋을 거라는 보장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게 논리적, 확률적으로나 '오류'지, 사람이 사는 일에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일종의 완충 장치나 보상의 논리 따위가 전혀 없는 셈이니 말이다. 추락한다면 정말 나락으로까지도 추락할 수 있고, 반대로 대기권을 뚫고 올라간다 한들 얼마든지 더 치솟을 수도 있다.


 물론, 아직 인간에게는 노력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 흔히 인용하는 '운칠기삼運七技三' 일화도, 아무리 칠 할이 운명일지언정 삼 할은 인간의 몫이니 환경 탓만 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교훈을 말한다. 심지어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예 운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바로 우리가 익히 경험한 바 있는 능력주의(meritocracy), 한국식으로 말하면 '노오력' 담론이다. 그리고 이는 굳이 부연할 것도  없이, 이미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사상으로 논파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애초에 넓게 보면, 노력을 가능케 하는 의지력과 가능성의 여부도 개인이 결정할 수 없으므로 곧 운이다. 인간이 그토록 쉽게 환경 탓을 하는 것은, 비단 유약한 존재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만큼 인간이란 환경(이 글에서는 '운'으로 바꾸어 볼 수도 있다)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인과응보니, 인생사 오르막길 내리막길 운운하는 것도 결국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불합리를 견뎌내기 위해 만든 말일 뿐이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간절히 바라다 못해 일종의 법칙이며 이치인 양 억지스럽게 규정해버린 것이다. '누구라도 결코 순탄하게/고통스럽게 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잘 알면서도.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운이 좋지?', '나는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운이 없어?', '아, 이때 딱 한 번만이라도 운이 따라줬으면 됐는데…'

 이런 말은 하등 가치 없는 푸념들로 폄하되기 마련이다.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운 탓을 한들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던 사람들은 분명 그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기로였을 것이다. 함부로 힐난하고 조소할 수 없는 이유다.


 물론, 대개의 경우 누구라도 특출하게 운이 좋거나 나쁜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운이 좋네 나쁘네 하는 것도 짧은 생에 있어 작은 점일 뿐, 결국은 정규분포에 속하는 삶을 사는 셈이다.

 그러나, 만약 그 평균에 벗어나는 경우라면? 그러니까, 유달리 운이 따라주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곳에도 기댈 곳이 없다. 참으로 슬픈 부분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도 마땅치 않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이기적일지언정, 나만큼은 '평범'이라는 그룹에 속하기만을 간절히 염원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평범한 삶이란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던가!


 소위 성공한 사람 중, 자신의 성공이 대부분 운에 의해 결정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할수록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고, 타인에게도 더 잘 베푼다고 한다. 능력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혀, 불가항력적인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불행한 삶을 산다고 하니 이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쪼록, 우연한 행운으로 인해 환희하기보다는 차라리 뜻하지 않은 불행에 의해 고통받는 경우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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