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 불가능한 후회

영화 '싱글라이더'

by 무덤덤

강재훈(이병헌)은 'Road End'라고 쓰인 그 길을 터덜터덜 뭐 하러 계속 가는가. 길 끝에 희망이 있나, 기회가 있나, 회복이 있나. 아무것도 없다. 파도나 철벅철벅 치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다. 절벽을 앞에 두고 강재훈은 왜 미소씩이나 짓고 서 있나. 스스로 치유라도 되었나? 허망해라. 내가 보기에 거기는 그냥 포기가 있다.



영화 '싱글라이더'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다. 반전은 보통 영화의 흥미를 높이는 역할을 주로 한다. 분명 '싱글라이더'의 반전은 '스포'를 당하지만 않는다면 무척 흥미롭다. 그렇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곰곰이 생각해보면 '싱글라이더'의 반전은 '두번째 기회'를 꿈 꿀 수조차 없게 하는 가혹한 전개였다. 희망이 말살 당한 참담함이 느껴진다.


승승장구하던 강재훈이 상사의 잘못된 정보로 실패의 나락에 빠졌다. 아마 그의 인생에 닥친 첫번째 변고였을 것이다. 그는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명성과 재산을 모두 잃은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것, 호주에 있는 가족에게 간다. 하지만 옆집 남자와 어울리는 아내 이수진(공효진)을 본 재훈은, 자신의 안에 있던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복수라도 하고 싶었을까. 재훈은 계속해서 아내 주변을 맴돈다. 그녀와 어울렸던 이웃집 남자의 뒤도 쫓는다. 그런데 분노에 사로잡힌 채 재훈이 아내의 삶을 탐색하면 탐색할수록 발견하게 되는 건, 자신이 없어도 그녀는 충분히 잘 살고 있다는 것. 여태까지 재훈은 수진과 아이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공유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사이에 수진은 홀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재훈은 이제 수진과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몇 년 동안 호주에 있었던 수진은 이제부터 그녀가 온전히 책임지고 가야 할 가족의 미래를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고 그 미래 안에는 재훈도 있었다. 재훈도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다. 재훈과 수진은 새 삶을 호주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기회. 그러나 재훈은 이미 그 기회를 포기해 버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찾아올 두번째 기회였는데, 아예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으로 믿고 '미래'를 포기했다. 이미 강재훈은 죽은 것이다. 제거된 두번째 기회. 최소한의 기대도 없이 지레 포기해버린 미래. 후회만 잔뜩 남아버린 재훈은 그 후회를 눈물로 죄다 쏟아버리고는 삶을 버렸다. 어리석고 안타깝다.


지나(안소희)에게도 두번째 기회는 잔인하게 묻혀버렸다. 지나는 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그렇게 허무하게 땅에 묻혀야 했나. 재훈과 지나는 단 한번의 실수로 삶을 제거당했다. 이 두 사람의 인생을 단번에 막 내리게 한 것이, 인생에 있어 단 한번의 실패라는 점이 중요하다. 어쩌면 이렇게 잔인한지.


죽은 재훈과 지나도 혼자 남았고, 살아있는 수진과 이웃집 남자도 혼자다. 잠시 서로 어울리기는 해도 영혼의 짝으로 만나 둘이 하나가 되는 일은 애초부터 없다. 강아지 '치치'마저도 죽은 뒤 제 갈 길을 휙 가버렸으니 어차피 혼자, 극도로 외로운 인생의 여정이다.


후회로 가득한 삶을 재건해볼 기회조차 감히 엄두도 못 내보고, 터덜터덜 삶에서 이만 내려올 때 '꽃'을 새삼 본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회생이 불가능한 후회만, 내려오는 그 길에 잔뜩 쌓일 뿐이다. 정말로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는 것처럼 삶에서 내려와버린 강재훈이 야속하다. 그는 왜 이토록 나약한가.


'헬조선'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한번 실패하면 돌이키기가 점점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두번째 기회는 정말 없을까. 아니면 한번 실패에 너무 절망한 나머지 곧 다가올 지도 모를 두번째 기회를 지레 포기해버리고 말았던 것인가. 분명한 건 실패하지 않으려고 우리는 엄청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사느라, 올라갈 때 '그 꽃'을 보지 못하고 있다. (2017년 3월 작성)


제목 : 싱글라이더 (2017, 대한민국)

OTT : 쿠팡플레이

keyword
작가의 이전글[책vs상] 열일곱 여고생을 보는 예순아홉 시인의 갈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