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册 vs 상像]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고독한 블록버스터
좀비 내지는 흡혈귀 등 변종인류를 다루는 영화에는 주로 낯선 존재(흉측한 존재)로부터 발생하는 공포로 스토리가 꾸려진다. 공포의 존재로부터 도망하거나 혈전을 벌이거나 그와 동시에 공포의 존재를 말살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런 까닭에 영화는 대체로 스펙터클한 그림이 만들어지며 그러다보면 블록버스터의 외양을 띠곤 한다.
2007년 개봉한 '나는 전설이다'는 편의상 좀비영화로 분류되지만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여서 전세계적인 흥행을 기대했던 블록버스터 영화였다. '나는 전설이다'는 블록버스터에 걸맞는 긴장감과 볼거리를 물론 갖추었으나 타 블록버스터 영화와 비교했을 때 차이가 나는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 바로 '고독'이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가 나름의 독특한 '고독감'을 가지게 된 데에는 원작에 기인한 바 크다. 원작인 리처드 매드슨의 1954년작 '나는 전설이다'는 판타지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책은 변종 바이러스가 퍼지고 사람들이 모조리 흡혈귀로 변해버린 세상을 그렸다.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세상에 달랑 남겨진 유일하게 온전한 사람이다. 홀로 남은 네빌에게 가해지는 지독한 고독을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집요하게 펼쳐냈고 책을 전설로 남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덕분에 영화 '나는 전설이다'도 다른 흔한 재난 블록버스터와는 다소 차별화된 분위기를 갖게 됐다.
원작과 영화는 서로 많이 다른 이야기. 그러나 정서는 통한다
하지만 스토리만 볼 때 원작과 영화의 유사성은 오히려 적은 편이다. 영화는 세상에 남겨진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원작의 설정을 갖고 왔으나 그 밖의 이야기는 대부분 다르다. 원작의 변종 인류는 흡혈귀로 보이지만, 영화 속 변종 인류는 좀비에 가깝게 묘사했다. 그리고 원작의 로버트 네빌은 고독에 몸부림치며 짐승 같은 포효를 하는 '마초'로 그려졌지만 영화 속 로버트 네빌은 인류를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부터 구하려고 애쓰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판타지 소설의 고전과 최신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간극은 원작의 스토리를 상업적으로 대부분 바꾸어야 하는 결과로 나타났지만 그래도 군데 군데 두 작품이 정서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발견된다. '책상(冊像)', '나는 전설이다' 편에서는 장면의 비교가 아니라 정서가 대응되는 장면을 서로 비교해보았다. 첫번째 장면은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네빌의 모습이다.
#1. My Name is Robert Neville
#2. 고독의 절정, 로버트 네빌이 밤을 보내는 법
'놈'들은 밤에 활동한다. 낮에는 신처럼 세상을 활보하던 네빌은 밤이 되면 집 안 어둠 속에 숨어서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새벽 내내 들려오는 '놈'들의 울부짖는 소리. 원작에서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3. 로버트 네빌은 '신'이 되었나?
네빌은 인류를 구한답시고 변종인류를 사냥해 실험을 한다. 원작에서도 네빌은 한낮에 휴면중인 여자 흡혈귀를 데리고 각종 실험을 하기도 한다. 원작에서의 실험은 변종인류를 더욱 손쉽게 없애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이었다면 영화에서의 실험은 변종인류를 다시 정상인으로 되돌리기 위한 '휴머니즘'적 연구를 위한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실험의 목적은 다르지만 네빌, 그만이 유일하게 변종인류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인식은 같다. 원작이나 영화의 결말을 보면 그 인식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금새 깨달을 수 있다.
#4. '개'의 죽음에 로버트 네빌, 눈물 흘리다
세상에 남은 유일한 인간. 하지만 홀로 있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로버트 네빌은 점점 인간성을 잃어간다. 그런 그에게 인간다움을 힘겹게 유지시켜주는 존재는 '개'다. 영화와 원작에서 네빌이 개를 만나게 되는 경위가 서로 다르긴 하지만 네빌이 죽어가던 개를 향해 흘렸던 눈물은 똑같은 무게를 갖는다.
#5. 로버트 네빌의 종말은 인간의 종말?
로버트 네빌은 결국 '놈'들의 습격을 받는다. 긴 고독의 시간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다. 이것은 세상 위 인간이 멸종하는 애석한 순간인가. 관객과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계의 전설이라고 칭송 받는 원작이 그러한 뻔한 결말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
인간의 오만함을 걱정해야 할 때
로버트 네빌의 종말은 인류의 종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변종인류라 불렸던 흡혈귀, 혹은 좀비의 모습을 한 신인류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시작이었다. "나는 전설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로버트 네빌이 죽음으로써 세상은 새 주인을 맞은 것이다. 이 전복적인 결말로 원작 '나는 전설이다'는 전설이 되었고 작가 리처드 매드슨은 '그랜드 마스터'가 된다.
영화는 원작의 충격적 결말을 온전히 따르기는 뭔가 께름칙했는지 극장판 결말은 로버트 네빌을 순교시키고 인간의 명맥을 이어준다. 하지만 감독은 또 다른 엔딩을 마련했다. 다른 엔딩에서는 좀비의 모습을 한 존재가 신인류로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둔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혹시 인간이 오만해질까 걱정을 했었나 보다. 이 걱정은 운이 좋게도 지금까지는 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인간들이, 이제는 심각하게 해야 할 걱정이 아닐까.
제목 : 나는 전설이다 (2007, 미국)
OTT : 쿠팡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