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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꼭지처럼 감정을 잠글 수 있다면, 조금 덜 아팠을까

-영화·드라마를 통해 배우는 감정 조절의 기술

by Purity and humility

세수를 하다 물이 넘쳤다. 잠깐 멍하니 있었을 뿐인데, 세면대의 물은 조용히 흘러 바닥을 적셨다. 정해진 양을 넘은 물은 언제나 다른 걸 젖게 만든다. 닦아내기 전까지는 불편하고 낯설다. 감정도 그렇다. 너무 오래 틀어두면 관계를 적시고, 결국 자신도 잠긴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필요한 만큼만 밸브를 돌리는 일이다. 마음의 수전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 감정의 수전이 고장 났을 때 사람은 어떻게 무너질까. 그 풍경을 가장 차갑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박화영〉이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밀려난 열아홉 살의 화영은 친구들에게 밥을 해주고 방을 내어주며 ‘엄마’라 불린다. 그러나 그 다정함은 누구에게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인간은 버려질 때 자존감과 통제감을 잃는다. <소외이론(Ostracism Theory, Kipling D. Williams)>에 따르면 그때 감정은 방향을 잃고 자신을 향해 폭발한다. <애착조절이론(Attachment Regulation Theory, Mikulincer & Shaver)>은 말한다. 불안한 관계일수록 감정의 밸브가 고장 난다고. 화영은 자신을 위해 밸브를 잠그지 못했다. 다정함이 넘친 자리엔 고립만 남았다.



박화영.jpeg <영화 박화영>


나도 그랬다. 일본에서 오래 살고, 미국에서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어디서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미국 사람도 아니었다. 언어는 늘 다르고, 관계는 늘 불안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또 내가 상처받기도 했다. 감정의 과잉과 고갈 사이 어딘가를 떠돌며 수많은 실수와 거짓말, 배신으로 얼룩진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몰랐다. 감정을 잘 느끼는 것과 잘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드라마〈은중과 상연〉은 감정의 타이밍을 놓친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때 연극을 함께하던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서로를 원망하며 살았다. 한쪽은 자신이 버려졌다고 믿고, 다른 한쪽은 오해 속에 갇혀 있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났지만, 대화는 화해가 아니라 폭로로 끝난다. 감정이 기억을 지배할 때 진심은 힘을 잃는다. 심리학자 제임스 그로스의 <감정조절이론(Emotion Regulation Theory)>은 말한다. 감정은 억누르는 게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다. 상황을 선택하고, 주의를 돌리고, 생각을 새로 짓는 일. Deci와 Ryan의 <자기결정성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은 덧붙인다. 감정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때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고. 결국 은중과 상연은 한 명의 불치병을 통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덤덤하게 끝을 맺는다. 그런데도 먹먹함은 남는다. 조절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조금 덜 아플 뿐이다.


은중과상연.jpeg <드라마 은중과 상연>


하지만 넘친 물이 반드시 흩어져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시 담는 사람도 있다. 그 회복의 얼굴을 보여주는 영화가 〈소울메이트〉다. 제주에서 함께 자란 미소와 하은은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였다. 그러나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마음이 어긋나고, 시간이 흐른 뒤 하은은 세상을 떠난다. 미소는 하은이 남긴 그림일기를 통해 친구의 진심을 마주한다. 자신이 흘린 감정을 다시 담는 순간이다.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의 <자기자비이론(Self-Compassion Theory)>은 말한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회복의 시작이다. <외상 후 성장 이론(Post-Traumatic Growth, Tedeschi & Calhoun)>은 상실을 통해 인간이 의미를 새로 세운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Doctrine of the Mean)>은 덧붙인다. 감정의 과도와 결핍 사이, 그 적정한 수압이 덕이다. 미소는 흘린 감정을 다시 담는 법을 배웠다. 흘려보내고, 고이고, 다시 흘려보내는 순환. 그것이 성숙의 온도다.


소울메이트.jpeg <영화 소울메이트>


나는 이제야 안다. 감정은 통제하는 게 아니라, 관계의 흐름을 따라 조율하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 세게 틀면 세상이 젖고, 너무 잠그면 마음이 마른다. 감정을 다스린다는 건 냉정해지는 게 아니다. 휩쓸리지 않는 일이다. 삶은 흘러가는 게 아니다. 흘려보내는 것이다. 흘린 감정 위로 다시 길이 생기고, 그 길을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단단해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마음의 수전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리고 물이 흐르는 한, 아직 늦지 않았다는 뜻이다.


감정은 삶의 물이다. 그러나 성숙은 그 물을 흘려보내는 기술이다. 너무 오래 잠그면 녹이 슬고, 너무 세게 틀면 세상이 젖는다. 감정을 다스린다는 건 냉정해지는 게 아니다. 휩쓸리지 않는 일이다. 삶은 흘러가는 게 아니다.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물이 흐르는 한,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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