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소환하는 권력의 네 얼굴과 단종의 시간
2025년 2월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유해진의 엄흥도, 박지훈의 단종, 유지태의 한명회.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흥행 자체가 아니라, 같은 역사 인물이 시대마다 전혀 다른 얼굴로 스크린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한명회는 1984년 「설중매」(정진)에서는 왜소하고 추한 음모가였고, 1994년 「한명회」(이덕화)에서는 야망과 개혁이 동시에 부각된 정치가였다. 2013년 「관상」(김의성)에서는 러닝타임 대부분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 그림자였고, 「왕과 사는 남자」(유지태)에서는 100kg 체급으로 서 있기만 해도 상대를 압도하는 존재가 되었다. 단종은 그보다 더 극적이다. 40년간 타인의 비극을 완성해 주는 장치에 머물다가, 이 영화에서 비로소 자기 감정을 가진 주인공으로 돌아왔다.
같은 이름인데 형상이 이렇게 달라진 이유가 뭘까. 한명회라는 인물은 원래부터 시대의 결핍을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존재였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과거에 번번이 낙방한 고아가, 끝내 계유정난을 설계하고 두 왕의 장인이 되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이 개인적 결핍이 권력의지로 전환되는 서사는 어느 시대의 창작자에게든 매력적인 재료다. 문제는 각 시대가 이 전환을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떤 시대는 그것을 음모로 읽었고, 어떤 시대는 전략으로, 어떤 시대는 공포로, 또 어떤 시대는 압도로 읽었다. 그리고 그 읽기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각 시대의 대중이 권력을 어떻게 체감하느냐이며, 그 체감은 경제 환경과 깊이 맞물려 있다.
「설중매」가 방영된 1984년은 전두환 정부, 제5공화국 시기다. 경제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 성장을 국가가 독점하던 시대였다. 개인이 경제적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는 사회에서 권력은 곧 '누군가 내 몫을 쥐고 흔드는 손'이다. 12·12와 5·17의 기억이 생생하던 시대, 대중에게 가장 실감나는 권력은 밀실에서 모의하는 얼굴 있는 폭력이었다. 한명회는 경호실장 장세동이나 경제수석 김재익 같은 실세들의 합성 이미지, 추하고 음험한 책략가로 읽힌다.
KBS 「한명회」가 방영된 1994년은 김영삼 정부, 문민정부 시기다. 이 시기에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은 경제 성장의 과실이 개인에게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소득이 오르고 금융실명제가 시행되면서, 사람들은 권력을 억압이 아니라 경쟁과 기회의 문법으로 읽기 시작했다. 3당 합당으로 정치 지형을 재편한 김종필이 이 시대의 권력 감각을 대표한다. 한명회가 주인공으로 격상된 것은 악을 미화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도덕 대신 능력의 기술로 이해하기 시작한 사회의 반영이다.
「관상」이 개봉한 2013년은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다. 이 시기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의 확신이 꺼진 뒤였고,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다는 감각이 사회 전반에 퍼지기 시작했다. 성장이 둔화하면 권력은 경쟁의 기술이 아니라, 누가 왜 판을 짜는지 보이지 않는 채 결과만 내려오는 구조로 체감된다. 언론이 '기춘대원군'이라 부른 김기춘이 비서실장으로 앉던 해, 한명회가 얼굴 없는 배후 권력이 된 것은 이 공포의 정확한 번역이다.
그리고 2025년, 저성장이 일상이 되고 부문 간 격차가 구조화된 시대에, 권력은 숨거나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 작동한다. 「왕과 사는 남자」의 한명회는 특정 누구가 아니라 구조적 우위 자체의 육체화로 섰다. 감독 장항준이 기존의 왜소한 한명회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깨고자 사료를 새로 조사했고, 유지태가 100kg 벌크업 체형을 유지한 채 연기한 이 한명회는 한 사람이 아니라 체급이 된 권력 그 자체다.
단종의 변화는 이 대칭점에 있다. 오랫동안 단종은 수양대군의 야심, 한명회의 책략, 사육신의 충절을 설명하기 위해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존재였다. 전두환 시기에도, 박근혜 시기에도 단종에게는 자기 감정이 없었다. 권력의 칼날이 서사의 전부이던 시대에, 칼에 쓰러지는 쪽은 비극의 증거물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은 폐위 이후에도 자기 소신을 갖고 행동하는 인간으로 돌아왔다.
영월 유배지에서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이 소년은, 두려움 속에서도 끝내 인간으로 남으려 한 존재로 다시 읽힌다. Z세대가 단종에게 열광하며 영월을 찾아가는 현상은 단순한 팬덤이 아니다. 저성장과 양극화의 시대에 사람들은 승자의 기술보다 밀려난 자의 존엄에 더 오래 머문다. 한명회가 구조적 권력의 얼굴이라면, 단종은 그 구조 아래 눌린 인간의 얼굴이다.
한명회가 품고 있던 고아의 결핍, 왜소한 체구의 결핍, 과거 낙방의 결핍은 시대의 경제적 결핍과 공명할 때마다 서로 다른 주파수의 악역을 만들어냈다. 그 반대편에서 단종은, 밀려난 자의 결핍이 서사의 중심에 놓일 수 있는 시대를 기다려야 했다. 이 작품들은 역사에 현대를 억지로 덧칠한 것이 아니다. 자기 시대를 정면으로 바라보기 위해 역사를 다시 불러낸 작업에 가깝다.
사극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가 바뀔 때마다 현재를 비추기 위해 다시 꺼내 드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왕조의 얼굴보다 먼저, 결국 우리 자신의 시대를 보게 된다. 사극이 반복되는 이유는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이 아니라, 결핍이 반복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