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공자의 진입과 전공자의 시간, 예술의 문턱에 대한 단상
예술의 문은 늘 무겁다.
누구는 그 문 앞에서 평생을 서성이고, 누구는 이름 하나로 안으로 들어간다.
서현의 롯데 콘서트홀 무대도, 박신양의 세종문화회관 전시도, 아마추어들의 IBK 챔버홀 연주도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갈랐다. 어떤 이는 특혜를 말하고, 어떤 이는 권위의 붕괴를 말한다.
틀린 반응은 아니다.
클래식 전공자는 네다섯 살부터 악기를 잡는다. 하루 여덟 시간씩 연습하고, 콩쿠르에서 떨어지고, 다시 연습한다. 수십 년을 그렇게 바쳐서 겨우 오르는 자리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이런 것을 '문화자본'이라 불렀다. 오래 쌓아야만 인정받는, 보이지 않는 자격 같은 것이다. 그 자격이 유명세 하나로 건너뛰어질 때 느끼는 불쾌함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철학자 아도르노의 걱정도 여기에 닿는다. 예술이 시장의 논리에 먹히면 깊이를 잃는다. 스타의 이름이 작품보다 앞에 서고, 화제성이 음악의 밀도를 밀어낼 수 있다. 그 우려는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그 논리만 끝까지 밀고 가면 도착하는 풍경이 있다. 텅 빈 객석이다. 경제학에 '보몰 비용의 질병'이라는 개념이 있다.
오케스트라는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수의 연주자가 같은 시간 동안 연주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비용은 해마다 오르는데 효율은 제자리다. 결국 공연 예술이 살아남으려면 관객이 늘어야 한다. 문을 걸어 잠그면 안에 있는 사람도 굶는다.
그러면 서현의 무대는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차르다시 연주는 완벽하지 않았다. 음정이 흔들렸고, 긴장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런데 교육학자 듀이의 말을 빌리면, 예술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경험이다. 무대 위의 떨림과 객석의 반응이 만나는 바로 그 순간이 예술이다. 사회학자 베커의 '예술 세계론'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예술은 천재 한 명이 혼자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와 기획자와 관객이 함께 만드는 세계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람의 진입은 침범이 아니라 연결이다. 닫힌 시장에 공기를 넣는 일이다.
서현이 바이올린을 켠 그날, 롯데 콘서트홀을 난생처음 검색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박신양의 그림을 보러 세종문화회관에 처음 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 한 명이 중요하다.
물론 기준은 있어야 한다. 선발 방식은 투명해야 하고, 기획 의도도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투명한 기준과 닫힌 문은 같은 말이 아니다. 지금 한국 예술에 더 급한 것은 성역을 더 높이 쌓는 일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을 만큼만 문턱을 낮추는 일이다. 완벽한 사람만 허락하는 무대에서는 아무도 새로 시작하지 않는다. 문 안이 비기 전에 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