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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18. 2020

선량한 차별주의자

미처 모르고 있던 사실


김지혜

창비

2019년 7월 17일


차별인지조차 몰랐던 차별


강자의 대열에 끼어본 일도 없으면서 늘 강자의 논리로 살았다. 결과적으로 나와 다를 바 없는 이웃을 차별하고 그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내가 그들에게 너그럽지 못했던 것은, 때로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것은 다만 남들보다 좀 더 정의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선량한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와 다른 목소리에 조금씩 귀가 열리면서, 내가 약자와 소수자를 향해 가했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읽게 된 고려대 김승섭 교수의 글에서, 그의 글을 읽다가 닿게 된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의 주장에서, 젊은 여성 홀로 지체장애자인 동생을 시설에서 탈출시킨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김지혜 교수가 쓴 이 책을 읽고 나 자신이 결코 선량하지 않은, 차별이 몸에 밴 이웃인줄 깨달았다.


저자인 김지혜 교수는 혐오표현에 관한 토론회를 마치고 한 참석자로부터 왜 ‘결정 장애’라는 표현을 썼는지 질문을 받는다. 질문이었으나 지적이었다. 저자는 비로소 자신이 ‘장애’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을 깨닫는다. 대학 입학하고 처음 들어간 동아리가 수화동아리였고, 사회복지학과 법학을 전공하면서 인권을 공부했고, 장애인의 권리와 법에 관한 수업을 들었고, 게다가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어 사정을 안다고 생각한 저자는 자신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차별이란 이렇게 은밀하고 집요하다.


예컨대, 누구든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라는 말이 이주민에게 모욕적인 표현이고,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말이 장애인에게 같은 의미라고 설명하면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이 말은 얼핏 칭찬이나 격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칭찬과 격려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주민에게 “한국인이 다 되었다”는 말은 자신이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살아도 “우리는 당신을 온전히 한국인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에 모욕적이고, 굳이 한국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한국인이 된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폭력적이다.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 역시 모욕적이다. 희망을 가지라는 건 장애인의 삶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며,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삶에 가치를 매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장애인이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건 이상하다. 장애인이 희망을 가져야할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변해야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차별인가?


저자는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비로소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특권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발견’인 것은 일상적으로 누리는 이런 특권은 대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어서 많은 경우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타지 않는 이상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서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시외버스를 타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남은 갖지 못하고 나는 가진 어떤 것, 그것이 특권이다. 저자는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능력주의와 기울어진 공정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 속에서 바라보면 버스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장애인의 결함이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이니 비장애인보다 돈을 더 내는 것이 공정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저자는 이를 ‘기울어진 공정성’이라고 질타한다. 애초에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속도와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누구나 능력 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노력과 능력으로써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책임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 불평등한 구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쏟은 노력을 보상하기 위해 차등적으로 대우해야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비정규직에게 정규직보다 못한 대우를 하는 게 당연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애초에 다르고, 따라서 다르게 대우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이 왜 기울어진 공정성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다음 사례로 설명하고 있다.


2010년 대학 졸업을 앞둔 한 청각장애인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그는 신입사원 채용기준에서 토익 600점 또는 그에 해당하는 영어성적을 요구한 것이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토익은 만점이 990점인데 듣기평가가 495점, 읽기평가가 495점이다. 청각장애인인 진정인은 듣기평가 부분 때문에 600점 이상 받을 수 없었다.
이 경우 청각장애인에 한해 채용기준을 낮춘다면 어떨까? 가령 300점 정도로 한다면 공정한 채용기준일까? 아니면 누구든 똑같이 토익 600점 이상을 받도록 해야 공정할까? 그렇게 해서 사실상 청각장애인은 아예 지원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게 정의로운 일일까?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토익 점수 요구기준에 차등을 두어 청각장애인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정의로운 일일까?
만일 토익점수가 업무에 꼭 필요한 능력이라면 이 채용기준은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보자. 토익점수 600점은 채용하려는 업무에 필요한 능력인가? 만약 동시통역사를 뽑는 일이라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 국내에서 사업기획, 기술개발, 시스템운영을 담당하는 일이라면 어떤가?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에 대해 영어듣기능력이 해당 채용분야 직무에 꼭 필요한 능력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핵심 업무는 기획, 서비스 발굴, 기술개발, 네트워크 및 시스템 운영이고, 영어 의사소통능력은 부가적인 기능일 뿐이라고 보았다. 근무예정지도 해외가아니라 국내였다. 영어소통능력이 본질적으로 필요하지 않은데 이를 이유로 청각장애인을 불리하게 대우하였으므로 이 채용기준은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그 사례의 말미에 저자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능력은 한 가지가 아니며 그 사람의 전부도 아니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


무엇인가를 반대하는 건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기 위치에 따라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을 수없이 경험한다. 저자는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라고 말한다. 사장이 어떤 직원을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라 바로 권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이성애자가 하는 “동성애자가 싫다”는 말은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싫다”고 하는 말과 같지 않다. 비장애인이 하는 “장애인이 싫다”는 말은 장애인이 하는 “비장애인이 싫다”는 말과 같지 않으며, 국민이 하는 “난민이 싫다”는 말은 난민이 하는 “국민이 싫다”는 말과 같지 않다. 저자는 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영향을 미치는 권력자가 방송에서 어떤 소수집단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은 단순한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그 소수자를 공공의 공간 바깥으로 밀어내는 신호라고 말한다.


블라인드 채용은 ‘실질적 평등’한 방법인가?


실력이 뛰어난데도 지방 출신이라서 번번이 채용을 거절당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 블라인드 채용은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 어렵다. 평등 실현의 선행조건인 ‘동등한 실력’을 갖추는 것부터가 이미 지방 출신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질적 평등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블라인드 채용은 평가자의 편향을 줄이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지만, 그것만으로 차별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실질적으로 평등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불평등의 대물림을 끊는 재분배 정책도 필요하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과도 싸워야 하며, 개인의 다양성을 고려한 제도를 만드는 다른 조치도 있어야 한다.


차별금지법


21대 국회 시작과 더불어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으로 소란스럽다. 기독교계의 반응은 격렬하다 못해 사활을 건 것처럼 보인다. 차별금지법이야말로 기독교적인 법률인데, 이걸 반대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어떤 목회자들이 정의당에 ‘성적지향’만 빼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전하기도 했단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제안했던지 우선 시작하고 차차 대상을 늘려나가는 일이 원만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저자는 분명하게 반대를 표명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특정한 차별금지사유를 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어떤 차별이 발견되지 않아 포함하지 못하는 것과 애초에 차별을 하고자 하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포함되지 않도록 반대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전자는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원칙에 따라 나중에라도 추가될 수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모든 차별을 금지한다는 대원칙 자체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의 기본 목적은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기본 원칙과 제도를 세우는 포괄적인 체계를 만들려는 것이다.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법 제정의 목적인 차별금지법에서 고의적으로 ‘성적지향’을 빼고 제정한다는 건 그 법의 목적을 훼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입법자에 의한 고의적인 차별행위가 된다. 말하자면 ‘차별조장법’이 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란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어떤 차별을 금지해야 할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성소수자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면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하는 차별금지가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 ‘사회적 합의’란 다수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다수결 제도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인 차별을 다수결로 해결하는 것이 의미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저자는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바꾸려고 하는데 논란이 없기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관철시켜야 할 일이라는 결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차별금지법의 원칙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No one left behind)”고 말한다.


시민으로 감당해야 할 일


차별금지법으로 일어난 파장이 이곳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수 없는 것은 단지 건들지 않아서 그렇지 누군가 건들기만 하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이 차별인지조차 모르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데 있다 하겠다.


늦게라도 내 스스로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국은 차별주의자’인 것을 깨달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칠 수는 없는 일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기 때문이다. 양심을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화목을 해치는 일이 되지 않기를 구할 뿐이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일까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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