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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13. 2020

야구는 선동열

선동열

민음인

2019년 10월 22일


모독


야구를 무척 좋아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고교야구가 한창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역량이라는 것도 그렇고 작전을 따질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깨알같이 번역된 일본 프로야구 규칙집을 끼고 스코어북을 직접 적어가며 보는 내 눈에 고교야구가 성에 찰리가 없었다. 실업야구가 열리면 만사 제쳐놓고 야구장에 가서 살았다. 어느 해인가는 연맹전 전체 55경기 중에 48경기를 보기도 했고, 도시락 싸들고 아침에 들어가 내리 세 경기를 보고 저녁에 나온 날도 적지 않다. 그렇기는 해도 영남대를 졸업한 김재박이 데뷔한 첫 해 타자 7관왕에 오를 만큼 실업야구 수준이 엉성했다.


요즘이야 메이저리거로 활약하는 선수도 적지 않지만, 그때는 일본 프로야구조차도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를 시작한다는 소식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MBC청룡과 삼성라이온즈 사이에 열렸던 프로야구 첫 경기를 울진원전 현장에서 라디오 중계로 들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렇게 야구를 좋아했지만 공교롭게도 선동열이 출전한 경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동문이기는 하지만 내가 졸업한 이후에 입학했으니 만날 일도 없었고, 그가 한국에서 활약하던 시기엔 현장에서 현장을 넘어 다녔던 터라 그런 사치를 누릴 기회가 없었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그의 위력을 실감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그는 독보적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투수가 이미 몇 명이 배출되었고 역량으로는 오히려 선동열보다 낫다는 평가도 있지만, 상대에게 주는 위압감은 그 누구도 감히 선동열과 비교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해태가 간신히 점수를 내자 김응용 감독은 손가락 부상으로 나갈 수 없던 선동열을 불펜에서 몸을 풀게한 일이 있다. 이 모습에 기가 죽은 빙그레는 선동열은 등판하지도 않았는데 1점밖에 못 내고 완패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친 것이다. 선동열이 본격적으로 마무리를 맡기 시작한 1993년부터는 경기 후반 그가 불펜에서 몸을 푸는 것만으로도 상대 팀은 전의를 상실하곤 했다. 혹자는 최동원과 쌍벽을 이룬다고도 하지만, 적어도 상대 팀에 미치는 위압감에서는 그 또한 선동열의 비교 대상이 못된다. 그 이후로 그런 투수는 나타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그의 경력은 선수로서 그의 경력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두 번이나 우승을 만들어내고 2018년 아시안게임에서 역시 우승을 일궈냈다. 작지 않은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선수시절 그의 압도적인 기록이 이것을 오히려 초라하게 만든 감도 없지 않다.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단한 선수가, 오직 야구 한길만 걸으며 국가의 위상을 높여 국민을 기쁘게 한 영웅이, 야구가 뭐고 스포츠가 뭔지 최소한의 지식도 갖추지 못한 함량미달의 국회의원 때문에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해 갖은 수모를 당했다. 당시 한국야구위원회는 국립대학 총장 출신 인사가 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조직의 장이라는 이가 조직의 구성원을 감싸지는 못할망정 국정감사 현장에서 스스로 전임감독제를 부정하고 함량미달의 정치인과 부화뇌동해 불세출의 영웅을 모욕했다. 그가 총재가 되기 전 사우디에 왔을 때 함께 식사한 일이 있었다. 동반성장위원장 자격이었는데, 명색이 경제학자인 그가 기업이고 정책이고 하는 말마다 물색없는 소리여서 어이없어 했던 기억이 있다. 국립대학 총장으로 객원 야구해설까지 해서 화제가 되었던 이었는데, 야구와 야구인에 대한 이해가 겨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일이 있고 며칠 후 선동열은 국가대표 감독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 책은 야구인으로서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이다. 2018년 국정감사에서 수모를 당하고 1년이 지난 후에 발간된 책이지만, 그는 2017년 11월에 열린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BC) 경기까지 언급하고는 “여기까지가 국가대표 감독으로서의 영광의 시절이었다”고 끝을 맺고 있다. 자신이 수모를 당한 2018년 아시안게임은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마무리를 위한 극복


일본에 진출하기 전까지 그는 한국에서 열한 시즌을 보내는 동안 146승 132세이브를 거두었고 방어율 1.2라는 믿기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가히 국보라 칭하기 아깝지 않은 선수였다. 그러나 일본 주니치 드래곤스에 진출한 첫해인 1996년, 5승 1패 3세이브에 방어율 5.5로 무너졌다. 그 성적을 ‘무너졌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는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997년 43게임에 출장해 1승 1패 38세이브에 방어율 1.28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부활했다.


선동열의 자서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엇보다 그가 자서전에서 이때를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리그 5위의 주니치를 단숨에 우승후보로 끌어올릴 만큼 기대를 받고 일본 리그에 진출한 그가, 첫해 이런 지리멸렬한 성적을 거두면서 겪었을 갈등과 그의 극복 스토리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 또한 자기 야구인생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했던지 그의 자서전을 이 이야기로부터 풀어나가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자기가 한국에서 이룬 성취에 도취되었던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오만했고, 준비가 부족했으며, 일본야구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첫 시즌을 앞두고 모친상을 당해 훈련에 차질을 빚었고, 심리적인 충격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의 부진에 대해 일본 언론은 그가 이미 전성기를 지나 한계에 도달했으며, 한국 야구가 일본에 비해 두 단계쯤 뒤져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때 “정상 페이스를 찾아도 일본 타자들이 내 공을 때려낸다면 내 모자람과 일본 야구의 우수성을 인정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몸무게가 13㎏이나 빠지고, 원형탈모까지 나타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왜 야구를 하는지 처음으로 회의가 들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가 찾은 돌파구는 훈련이었다. 비시즌 동안 하루 3천 개씩 공을 던지며 투구 폼까지 교정하고 새 시즌을 준비한다. 결국 이듬해 부활하면서 주니치의 굳건한 마무리로 자리매김했고, 1999년까지 네 시즌 동안 통산 10승 4패 98세이브 방어율 2.70을 남긴 뒤 화려하게 은퇴한다.


결과를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그는 일찍이 겪어보지 않은 수모를 견뎌내야 했다. 그는 1996 시즌 중에 2군으로 내려가고, 끝내 3군까지 내려간다. 물론 회복을 돕기 위한 조치였지만, 한국 국보인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을 것이다. 거기서 모든 동작의 기초인 Step and Throw부터 연습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기본기를 잊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 뒤에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투구 폼을 지켜봐왔던, 그래서 그의 투구 폼이 변한 것을 알아차린 이바나 코치가 있었다. 우리는 흔히 뛰어난 선수에게는 코치가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보듯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고 해도 자기에게 일어난 변화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흐트러진 것을 알지 못하니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니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 각오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낼 수 있는 조력자라는 것이다.


이는 연주자도 다르지 않다. 지난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 중견가수가 코치의 도움을 얻어 갑상선 수술로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이십여 년 정상을 지키던 가수에게 무슨 코치가 필요할까 생각했지만, 그가 코치의 도움을 얻어 목소리를 회복해가는 과정은 감동적이었다. 그러니 슬럼프에 빠졌거든 무엇보다 먼저 자기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내 줄 수 있는 조력자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하겠다.


도약을 위한 극복


1991년까지 매년 30경기 정도 출장하던 그는 1992년 부상으로 11경기에 출장한다. 11경기에 출장해 2승을 거두었고 방어율은 0.28에 불과했지만, 구단이 그에게 의존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그가 말한 대로 거의 통째로 한 시즌을 쉰 것이나 진배없는 성적이었다.


투수가 팔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부상이었는데도 한 달이나 지나서야 건초염 진단을 받을 수 있었고, 치료하는 중에도 띄엄띄엄 마운드에 올랐다.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중에도 그는 26.2이닝 무실점 기록을 남긴다.


결국은 그동안 어깨를 혹사한 것이 부상의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대로 가다가는 투수 생명이 끝날 수밖에 없으니 투구 수를 줄여야 했고, 고심 끝에 마무리투수로 전향한다. 요즘이야 마무리투수는 1이닝, 길어야 2이닝을 소화하지만 투수 분업이 확실하지 않았던 당시는 마무리투수가 3-4이닝을 던지는 것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마무리로 전환한 첫해 126이닝을 던진 이래 일본 리그 진출할 때까지 매년 1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요즘 마무리투수가 50-70이닝 정도 던지는 것에 비하면 그것 역시 혹사였다. 아마 지금처럼 이닝 수를 조절했다면 그의 야구 인생은 최소한 몇 년 더 연장되었을 것이다.


불행으로 여겼던 1992년 어깨 부상은 그의 야구 인생에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다. 1993년 선발에서 마무리로 전환해 10승 3패 31세이브를 올린다. 1995년 시즌이 끝난 후 열린 한일슈퍼게임에서 마무리로 뛴 그는 이를 바탕삼아 일본 리그로 진출하게 된다. 발상을 전환함으로서 불행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성찰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이래 대학 때까지 야구일기를 썼다.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봤다. 그는 그때 일기에 썼던 문제의식이나 성찰은 정확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그의 일기에서, 메모를 통해 정리해놓은 성찰 몇 가지를 추렸다.


○ 변화구에 대한 컨트롤이 일정하지 않았다. 밤마다 고민하고, 또 일기장에 고민을 남겨두고,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내 공에 대해 후회하며 반성하곤 했다. ‘야구는 후회를 관리하는 게임(사이영상 수상자 로버트 디키)’이라는 사실을 나는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 달리기는 가장 재미없는 운동이다. 하지만 나는 재미없는 달리기를 통해 나 자신과 싸워 이기는 법을 배웠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도 나를 넘어서는, 정신적으로 나를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 야구선수로서 나의 일관성을 만들 수 있었다. 던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루에 100개 200개 던지는 것, 정말 지겹고 때로는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재미없는 일을 나의 루틴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단조로운 달리와 던지기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 피칭은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동작이다. 특히 강속구 투수라면 타자보다 부상과 싸우는 것이 더 어렵다.


○ 체격이 커지고, 근육이 강해지고, 관리를 잘 받으면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인대와 관절 강화에는 한계가 있다. 강속구의 시대에 부상 위험이 커지는 이유다. 그렇기에 투수에게는 ‘최고 구속’보다 ‘강속구를 지속적으로 던질 수 있는 폼’이 중요하다. 투수의 본질은 강속구를 던지는 게 아니라, 타자를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 모든 팬들이 내가 엘리트 선수로 순탄하게 야구를 했다고 알고 있다. 일본 진출 첫 해에 2군도 아닌 3군 교육리그에 갔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엄청난 좌절을 느꼈다. 국내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국보라는 과분한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첫 해에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나 자신에게 너무 부끄러웠다. 진짜 선동열이라는 사람이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나에게 부끄럽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운동했다.


○ 야구는 다른 선수의 희생을 먹고 산다. 물론 다른 경기에도 패스가 있고 어시스트가 있다. 단체 경기라면 어느 경기에나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다. 특별히 희생정신이 강한 선수도 있다. 그러나 야구는 희생이 공식화 되어 있는 유일한 스포츠다. 희생을 인정하고, 계량화하고, 통계로 기록하는 유일한 스포츠다. 내가 야구인으로 살면서 늘 고민해온 것 중 하나가 “왜 야구에만 희생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애구는 희생번트를 통해 주자를 한 루 더 진루시킨다. 야구는 희생 플라이를 통해 주자를 홈으로 귀환시킨다. 모두가 희생을 전제로 하는 플레이들이다.


기록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게 마련이다. 선동열이라는 전에 없었던 강한 빛 때문에 억울하게 그늘에 살아야 했던 선수들이 적지 않다.


선동열은 1986년 0.99라는 경이적인 방어율을 올려 수위 투수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해 방어율 2위는 최동원으로 1.55, 3위 최일언 1.58, 4위 김용수 1.60, 5위 김건우 1.80, 6위 장호연 1.90 이었다. 지금 어느 투수도 생각할 수 없는 방어율을 올린 투수들이 선동열이라는 거인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잃었다.


그가 세운 셀 수 없이 많은 기록 중에 대표적인 기록 몇 가지를 살펴본다.


○ [평균방어율] 1.2 (한국리그, 1985-1995년), 2.7 (일본리그, 1996-1999년)

○ [방어율] 최고 0.78 (1993년), 최악 2.73 (1994년)

○ [1986년] 39게임 출장, 24승 6패, 22게임 선발등판, 19게임 완투, 8게임 완봉

○ [한국리그 역대통산] 최저 방어율 (1.2), 최다 완봉승 (29승)

○ [연승] 롯데전 20연승 (만 7년 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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