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9년 11월 20일
저자는 서두에서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밝힌다. 제기한 문제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저자는 신학자답게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바탕으로 서술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인생 체험과 기억을 통합해 서술하면서 그런 사실을 처음부터 밝힌 것이다. 신앙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게 당연한데도 성경이나 신학과 관련한 책에서는 모두 자기 생각이 정답인 것처럼 말해 읽을 때마다 곤혹감을 느끼곤 했다. 저자의 이 전제 덕분에 그런 부담을 덜어내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신앙이 무엇인가 물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저자는 신앙을 ‘성경의 명제에 동의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성경의 명제에 동의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반드시 신뢰하는 게 아닐 수 있고, 성경의 명제에 동의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신뢰할 수도 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근거와 기초가 되시며, 우리가 피할 안전한 곳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 관점에서 신앙은 ‘성경의 명제에 동의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저자는 신앙의 또 다른 본질로 ‘신실함’과 ‘시선(vision)’을 들고 있다. ‘신실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헌신’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러니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에 충실한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지고,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반응하는 방식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저자는 사안을 바라보는 방식인 ‘시선’을 신앙 본질 중 하나로 여긴다.
지금도 종종 주변에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경우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더욱 자신의 신념을 강화한다. 창조과학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세상이 성경이 말하는 대로 칠 일 만에 창조되었고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성경을 역사서로 여기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은 역사의 선물이 아니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님께 응답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글’이 아니며 ‘하나님께 감동받은 사람들이 쓴 글’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 문화적 서술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견해는 자칫 성경을 부정하는 매우 불경한 모습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전적으로 저자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 나 역시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서라고 여기며, 따라서 성경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데 이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은 맞지만 그것을 기록한 주체는 사람이므로 기록한 내용이 기록한 사람의 상황을 벗어나거나 지식수준을 넘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내용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기록한 사람의 상황과 지식수준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 중 하나가 동성애에 관한 내용이다. ‘동성애’라는 용어는 1867년 크라프트 에빙이라는 독일 의사가 처음 제안한 개념으로, 스스로를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인식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복음서나 서신서가 기록된 당시에는 성적지향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당연히 성적지향을 동성애ㆍ이성애ㆍ양성애 같은 범주로 나눌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신약학자인 빅터 폴 퍼니쉬는 “바울서신을 연구한 결과 사도들이 동성애에 대해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당시 동성애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개념도 없는 시대에 기록된 글을 역사적 진실이라고 믿다 보니 마치 성경이 과학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가 말한 것처럼, 또한 내가 믿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고백이 아니라 신앙의 조상들이 자기 신앙을 고백한 것이니 성경과 과학이 충돌할 일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의 말씀도 그렇다. 이것 또한 글자 그대로 진리로 여겨 교리로 못 박고 다른 신앙을 배척하는 근거로 삼고 있지 않은가. 저자 또한 이 말씀은 교리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성육신한 삶을 살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말씀이라고 강조한다. 저자의 견해에 구구절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이러한 오해가 비단 현대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면서 그 예로 ‘하나님 나라’를 들어 설명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을 때 청중은 즉각 자신들이 사는 ‘불의한 지배 체제’가 작동하는 나라를 떠올리고 그와 반대되는 나라로 이해했을 것이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를 ‘천국(Kingdom of Heaven)’으로 바꾸어 사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내세를 강조하게 되고 급기야는 기독교가 요구와 (죽음 이후에 받는) 보상의 종교로 둔갑하게 되었다.”
저자는 구원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해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탄식한다. 그러면서 영생은 죽음 너머의 시간이 아닌 현재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영생을 현재 시제로 표현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어렴풋하게나마 그렇게 짐작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선명하게 정리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처럼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고,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으며, 특히 성경을 문자로만 이해하려 드는 이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내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실제로 미국 갤럽 조사 결과 성경은 실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래서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데 동의한 사람이 지난 수십 년 사이에 크게 줄어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1963년에는 65%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러한 전제에 동의했으나 2001년에는 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7%에 불과했다. 그래서 저자는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과거(earlier) 방식’과 ‘새로운(emerging) 방식’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가르는 잣대로 ‘여성 안수, 동성애, 배타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잣대 중에 동성애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확고한 내 생각을 밝혔고, 배타주의는 저자가 말한 대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예수 안에서 성육신한 삶을 살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말씀인데도 이를 글자 그대로 진리로 여겨 교리로 못 박고 다른 신앙을 배척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여성 안수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는 성경이 신앙고백서라는 사실을 깨닫기 훨씬 이전부터 교회에서 여성에게 너무나 많은 제약을 가하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성의 역할이 없었다면 또 모르겠으나, 사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봉사가 여성의 힘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여성이 기여하고 있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남녀가 동등하게 역할을 맡는 게 합리적일 텐데, 교회 대다수가 도대체 이치에 닿지 않은 성경 몇 구절을 꿰어맞춰서 여성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는 물론 권사도 안수가 아니라 임직이라는 해괴한 이름을 붙이는 횡포를 저질러 왔다.
연약한 자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자들을 구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 안으신 예수의 삶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여성을 차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신앙의 본질이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라는 건 그저 표어였다는 말인가?
사우디 리야드 교회에 출석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동안 안수집사와 권사를 선출하고도 안수는 남성인 집사에게만 베풀었던 데 이의를 제기한 몇몇 교우들의 바람대로 새로 선출하는 권사도 함께 안수를 베풀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안수를 위해 초청받아 온 목사 한 분이 안수를 거부해 그분을 뺀 나머지 분들만 안수에 참여해야 했다. 이 때문에 축하와 감사로 가득해야 할 자리가 민망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자리가 되었다.
귀국하고 나서 루터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매우 자랑스러운 교회이고 지금껏 그 결정을 후회해 본 일이 없다. 한 가지만 빼고. 작년에 장로 선거가 있었는데 여성은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 기준은 바뀌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자랑스러운 교회가 그런 구습에 묶여 있는지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하루속히 만인이 평등한 예수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