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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요약] 추락하는 한국 교회

by 박인식

이상성

인물과사상사

2007년 10월 8일


한국 교회와 근본주의 신학


한국 개신교회는 근본주의 신학을 가진 선교사들이 이끌었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미국에서는 일부 감리교회와 극소수의 장로교회, 그리고 절대다수의 침례교회만 근본주의 신학을 따르는데, 공교롭게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하나같이 이곳 출신이었다. 근본주의 신학은 19세기 미국에서 태동한 신학으로, 전 세계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희귀하고 이상한 신학 사조이다.


근본주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축자영감설을 따른다는 것이다. 성서의 한 자 한 자가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축자영감설은 번역서에도 해당해 영어 성서는 흠정역(KJV, King James Version)만 인정한다. 축자영감설은 성서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절대화하기 때문에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대해 철저히 배타적이며, 따라서 이들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


종말론은 미래에 올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 때문에 현실 사회가 어떻게 변해가든지 무관심한 채로 살아가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하지만 성서의 참된 종말론은 미래에 도래할 천년왕국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 새 땅을 말한다. 슬퍼하는 이들이 위로받으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어지고, 의를 위해 박해받는 이들이 주인이 되는. 예수의 말씀대로 종말이란 바로 이와 같은 나라가 이루어진 때를 말한다.


따라서 종말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두고두고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야 할 사건이며, 살아있는 동안 자기 안에서 수없이 되풀이해야 할 사건이다.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종말을 믿고 그것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때 종말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 되고 우리 것이 된다. 십자가는 바로 이런 종말을 위한 고난과 희생과 자기 부정이다.


성서해석학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물론 처음에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이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등장한 것이 성서해석학이다.


본문비평 : 성서의 원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수많은 사본과 번역본만 남아 있을 뿐이다. 수천 편에 이르는 사본과 번역본을 비교해가면서 본문을 확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본문을 확정하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사본 이상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성서도 그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본문비평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문학비평 :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서를 문학적으로 분석하면 많은 걸 찾을 수 있다. 한 책 속에 초등학생 수준의 저급한 문장과 대학원생 수준의 고급 문장이 섞여 있다면 그 책은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저자가 썼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성서에서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단어를 찾아내어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자료비평 : 성서 본문을 기록할 때 참고하거나 인용한 자료를 연구해 본문 내용을 확정하고 성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전승비평 : 성서는 대부분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러 문서화 한 것으로, 성서 전승 역사를 파악해 본문의 원래 의미를 분명히 하고 문헌의 원래 모습을 복원한다.


양식비평 : 율법서 양식은 시편 양식과 다르고 예언서 양식은 역사서 양식과 다르다. 이처럼 성서의 양식을 연구하면 그 문서가 지니는 의미가 더욱 명확히 드러나고 시대적 배경도 드러난다. 양식비평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서는 구약 시편이다.


편집비평 : 편집자가 어떤 자료를 생략하고 어떤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지 살펴보면 편집자의 선입견이나 편집 목적, 나아가 신학을 알 수 있다.


역사비평 : 문서가 언제 기록되었는지 역사적 배경을 밝히고, 나아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한다.


사회비평 : 본문이 지니는 사회적 배경을 확인한다. 본문이 어떤 사회적 배경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본문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올바른 성서해석의 중요성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애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사용한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원래 그리스의 정치집회를 의미했다. 에클레시아를 교회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온전히 독립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 이후부터이니,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신학을 정립하면서 신학자들이 추가한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이 말을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게 해서는 안 된다.


성서해석은 전문적인 지식과 훈련 과정을 거친 신학자와 신학을 배운 목회자에게 맡겨야 한다. 목회자들은 신학자에게서 배운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목회 현장에 잘 적용해야 한다. 그것이 당장 교회의 양적 팽창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옳은 것을 틀렸다고 말하고 틀린 것을 옳다고 말하는 죄악을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목회자 상당수는 이런 성서해석을 무시한 채 자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해석으로 설교하고, 오히려 성서를 신학적 방법론으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신학자와 목회자를 이단이라고 공격한다.


종교다원주의


한국 교회 근본주의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종교다원주의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이 세상 유일한 진리의 종교는 기독교 하나뿐이며 그것도 개신교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기 종교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확신을 갖는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비하하거나 우리 종교로 개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독선이며 폭력이다.


우리나라에서 배타적 근본주의 기독교가 성공한 것은 선교 정책이나 신학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가 침략자가 아닌 모습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에는 이미 일본이라는 침략국이 버젓이 행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침략국의 첨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배타적인 근본주의 기독교는 교회 발전에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했다.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하는 바탕에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요한복음 14:6 말씀이 자리 잡고 있다. 중요한 점은 요한복음의 이 말씀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 가장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예수의 삶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책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새로운 개척지, 세계 종교로 나아가는 기독교가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자기 확신을 굳건히 하기 위해 교회가 교회 공동체에 내리는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는 확실히 공동체에 강한 힘과 선교를 향한 추진력을 갖게 했을 것이다.


삶의 자리


성서를 해석할 때 삶의 자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만약 성서를 문자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등장할 필요가 없다. 십계명 같은 식의 법률적인 진술만 있으면 된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진술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성서에 이런 식의 진술은 극소수에 속하고 대부분 인간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을 담고 있다. 삶의 자리에서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은 삶의 자리를 비추는 빛 아래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자리를 무시한 성서 해석은 심각한 오류를 빚을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의 혼합주의


한국 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종교 혼합주의는 샤머니즘과 유교 이념이다. 한국 교회 기복신앙의 근원은 누가 뭐라 해도 샤머니즘이다. 또 하나의 혼합주의는 가부장적 유교 이념이다. 한국 교회는 어디 가든지 나이에 따른 서열과 성별에 따른 차별이 확연하다. 유림을 제외하면 한국 사회에서 교회만큼 가부장적 요소가 잘 보존된 단체나 집단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교회는 샤머니즘 30%, 유교 이념 30%, 기독교적 요소 40% 정도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혼합종교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 교회는 샤머니즘과 유교 이념이라는 잘못된 종교 혼합주의는 용납하면서 정작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혼합주의는 시도조차 금지한다. 우리 전통의 제사가 그 좋은 예이다. 제사에 깃든 신적 요소나 우상숭배 요소를 배제하고 기독교적 개념을 적용한 제사로 변형하자면 이단이라고 배격한다.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해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살아계실 때 하듯 절하면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죽은 사람에게 절하는 건 우상숭배라고 우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며 절하는 게 우상숭배라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나 국기에 대한 경례는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을까?


미국 선교사에 대한 오해


조선 초기 기독교 운동은 단순한 신앙 운동이 아니었다. 조선 사람들은 문명과 신앙을 혼동했고, 예수에 대한 신앙이 조선인의 존엄을 되살려 줄 것이며 조선 민중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무조건 환영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기독교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조선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 문명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깊게 간여한 것은 선교사의 영향이 아니다. 선교사들이 선교의 방편으로 제공한 교육의 효과로 인해 얻게 된 간접적인 효과였다. 이런 정황은 조선 기독교인들의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태도로 더욱 명확해진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이 1912년 출판한 <한국의 상황>이라는 책에서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방도를 찾고 있고, 이를 위해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과 협력해왔다. 일본에 저항하는 걸 조선 기독교인들은 반기겠지만, 조선에 있는 미국 선교사 중에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일본에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선교사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라고 믿는다. 나는 평양의 미국 선교부에서 회의할 때 표결에 부친 결과 미국 선교사들은 만장일치로 일본에 충성할 것을 결의했다. 나는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과도 회동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들도 만장일치로 이를 가결하고, 일본인에 대한 특별한 사랑은 선언하지 않았지만 정치로부터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선언했다.”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들과 그들로부터 기독교를 전해 받은 조선 기독교 지도자 대다수가 조선의 운명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개인적인 신앙과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다.


참된 선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한국 교회의 해외선교는 동기가 불순하다. 세계인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일반 사회의 공격을 차단하고 내부 교인들의 이목을 해외선교로 집중시켜 교인들의 신앙심을 고양하고 교회에 대한 충성을 다지려는데 목적이 있다. 물론 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물심양면으로 희생하는 평신도들은 이 문제에 책임이 없다. 책임은 불순한 동기로 선교정책을 입안하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주입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다.


선교란 선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걸 말한다. 따라서 선교하려면 그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그들이 굶고 있으면 양식을 제공하고, 아프면 치료하고, 교육을 못 받고 있으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선교인 것이다. 그래서 해외선교 갈 때 그 지역 사람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단발성이고 과시적이며 우월한 태도를 보이는 공격적인 선교활동이나 선교여행은 궁극적으로 선교에 심대한 타격을 준다. 특히 단발성 선교여행은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만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


선교란 하나님이 할 일을 우리가 대신하는 것이다. 하나님 대신 하나님 백성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희생한다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외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알리지만 굳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고 선전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들이 더욱 나은 삶, 더욱 인간적인 삶, 인간으로 누리고 살아야 할 것을 누리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성서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책을 먼저 전하고, 하나님 말씀보다는 당장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천당 가는 방법보다 당장 질병을 고치는 데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인권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왔소”라는 우월한 자세를 버리고 “우리에게 봉사할 기회를 줘서 고맙소”라고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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