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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마포 주공아파트

by 박인식

박철수

마티

2024년 3월 30일


엊저녁 마포에서 지인과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는데 국민학교 다닐 때 머리 깎던 이발소 자리가 보였다. 워낙 많이 바뀐 곳이어서 위치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해 착각한 것이었지만, 덕분에 육십 년도 훨씬 넘은 옛날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저녁 식사한 곳이 옛날 마포아파트 자리 근처였는데, 공교롭게도 요 며칠 바로 그 아파트 건설과정을 정리한 <마포 주공아파트>를 읽고 있어 그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재개발 아파트가 여상히 보이지 않았다. 재개발이라고는 해도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으니 어쩌면 국내 최초로 재개발 아파트를 재개발하는 경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도화동으로 이사가 두 해쯤 살았다. 경보극장 옆 골목 어디쯤이었는데, 극장 지붕 위에 세워놓은 네온사인이 볼 때마다 매번 신기했다. 네온사인이라고 해야 고작 영화제목을 적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밤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네온사인이 큰 볼거리였다. 그리고 그해 그곳에 마포아파트가 들어섰다.


마포아파트는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주거 형태였다. 이전에도 아파트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으로 치면 다세대 주택 같은 허름한 것뿐이었지 마포아파트처럼 수백 가구가 넘는 고급 주택단지와는 전혀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해야 공덕동 로터리 근처에 있던 3~4층 정도 되던 소방서 망루 정도였으니, 그런 것만 보고 살던 내게 마포아파트가 얼마나 대단하게 느껴졌겠는가.


마포아파트가 준공된 1962년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건설 배경을 짐작할 만하다.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을 보다 못해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혁명 주체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뭔가 구체적인 성과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심 혁명을 일으킬 때 제시한 ‘2년 뒤 민정 이양’이라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파기할 수 있는 명분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포아파트는 당초 10층 높이에 엘리베이터와 수세식 화장실, 중앙난방, 공원, 어린이 놀이터, 유치원, 탁아소를 갖춘 최첨단 주택으로, 11동 1,158가구로 계획했다고 한다. 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때였으니 어찌 보면 무모한 계획일 수 있었고, 실제로 한국 정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던 한미경제협조처(USOM)의 반대가 심해 결국 높이를 6층으로 낮추고 엘리베이터도 설치하지 않는 것으로 바꿨다. 이유야 어쨌든 미국의 입김이 한국 정부의 정책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내막을 살펴보니 구구절절 틀린 말이 하나 없다 싶을 만큼 계획이 엉성했고, 또한 무모했다.


당시 미공개 자료로 분류되었던 USOM 보고서에 따르면 도로와 건물 배치만 되어 있을 뿐, 건물 구조계산서도 없고, 기초 지반의 적정성을 평가하기 위한 토질조사도 수행하지 않았으며, 엘리베이터에 대한 상세한 조건은 물론 전기 기계에 대한 세부 도면도 마련되지 않았다. 외부 층고가 2.6미터인데 슬라브 두께가 0.6미터에 이르니 내부 층고는 2미터인 셈이었는데 이 정도면 옷 입을 때 팔을 위로 뻗쳐 들기도 어려운 상태이다. 취사용 연료를 연탄으로 계획해 놓고 연탄 쌓을 곳도 없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기본계획-기본설계-실시설계’ 단계를 거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거기에 ‘시공설계’를 추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야 설계도를 가지고 건축 자재를 준비하고 실제로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런데 마포아파트 당초 설계는 시공설계-실시설계는 고사하고 기본설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하긴 마포아파트 건설 추진 주체였던 한국주택영단(한국주택공사의 전신) 지어본 건물이라고는 고작해야 2~3층 규모를 넘지 않았으니 어쩌면 설계 미비가 당연한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마포아파트 건설에 반대한 것은 USOM 뿐만 아니었다. 마포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안양으로 이전한 마포 형무소에 딸린 채소밭 자리였는데, 이곳은 워낙 한강 상습 범람지로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도 물에 잠겼다. 그래서 지반이 약해졌을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선 이들이 생겼다. 하지만 토질조사를 통해 기초 지반 상태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거기에 나무말뚝을 설치해 지반을 보강했다. 이것이 국내에서 주택건설을 위해 실시한 첫 번째 토질조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언급은 토질조사를 수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USOM 보고서와 상반된다. 이뿐 아니라 USOM에서 마포아파트 건설과 관련한 문제점을 보고서로 작성한 것이 1961년 11월 22일인데,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는 한미경제협력위원회는 1963년 7월 18일 한국의 제반 경제문제 검토 및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 합의로 설치한 것으로 나온다. 말하자면 USOM은 생기기도 전에 서울에서 활동한 셈이 된다.)


우여곡절 끝에 1962년 12월 1차분 366호 공사를 마치고 임대 신청을 받았다. 1차분은 Y형 6동으로 이루어졌는데, 1965년 5월 준공한 일자형 2차분은 모두 분양 신청을 받았다. 이어서 1차분도 1967년 분양으로 전환했다. 당초 계획과 달리 분양으로 전환한 것은 한국주택공사의 자금난 때문이었다.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내게 마포아파트의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단지 울타리 쇠창살에 올라서서 안쪽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그때 함께 안을 들여다보던 우리에게 가장 부러운 것은 바로 놀이터였다. 놀이터라고 해봐야 철봉, 시소 몇 개에 정글짐이 고작이었지만 정글짐은 학교 놀이터에도 없었다. 마침 아버지 친구 중에 마포아파트 사는 분이 계셨는데, 놀이터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집 동 호수를 알려주며 이 집에 심부름하러 왔다고 말하고 들어와 놀다 가라고 했다. 언제든 놀이터를 쓸 수 있다는 건 당시 내게는 큰 권한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곳 주민은 모두 부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는 당시 아파트가 고작 9평형, 12평형, 15평형뿐이었고 그나마도 임대 주택이었다고 말한다. 감히 넘보기 힘든 부자들이 사는 집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저자가 수록한 자료에 따르면 월 임대료가 2~3천 원 정도인데, 그로부터 몇 년 뒤 우리 가족 하루 생계비가 100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결코 싼 금액은 아니었다. (다섯 식구가 하루를 버티려면 쌀 큰 거 한 되, 보리쌀 작은 거 한 되, 연탄 한 장이 필요했고, 그 심부름을 늘 내가 다녔다.)


이 책에는 마포아파트 전경이 꽤 여러 장 실려있다. 중앙 통로 좌우로 Y자형 6층 아파트가 각 3동씩 있고 단지 둘레를 따라 일자형 아파트 4동이 들어서 있는 사진인데, 난 일자형 아파트를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Y자형 아파트는 1차분으로 1962년 12월에 준공되었고, 일자형 아파트는 1965년 5월에 준공되었다. 그 무렵 돈암동으로 이사했으니 기억에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사기간을 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1차는 1962년 8월 31일 착공해 석 달 후인 같은 해 11월 28일에 준공했고, 2차는 1864년 11월 7일에 착공해 여섯 달 후인 1965년 5월 12일 준공했다. 어느 쪽이든,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장비를 동원했든, 말도 되지 않는 기간에 끝낸 것이다. 그래도 마포아파트가 부실시공으로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주택 역사는 마포아파트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고 해도 무리한 게 아니겠다. 지금 우리 인구 절반이 살고 있을 만큼 아파트가 절대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출발이 바로 마포아파트인 셈이니 말이다. 사실 당시 혁명 정부에게 마포아파트 건설 사업은 단지 대규모 주택 공급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토지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주택을 평면에서 높이로 전환하고, 생활 양식을 간소화하고, 환경을 단위 가족생활에서 주택 집단생활로 전환하기 위한 정책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희망자가 몰릴 것으로 생각한 초기에는 추첨제를 계획했지만 결국 선착순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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