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돌아올 때만 해도 본사로 복귀하는 건 아예 생각에도 없었다. 어떻게든 뭔가라도 이뤄보겠다고 발버둥 쳤다는 것만으로 십수 년 빈손 결산이 합리화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돌아온 것인지도 애매했고. 사우디로 돌아간다고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끝낼 수는 없는 일이어서 돌아갈 상황만 살피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돌아왔다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다시 일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내 경력을 써먹을 수 있는 자리는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으니 사무보조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구직사이트에 등록하고, 양식에 맞춰 이력서를 만들고, 열심히 지원서를 보냈다. 자기소개서에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백 곳 넘게 보냈지만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심지어 제출한 서류를 열어보지조차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드디어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담당 임원이 직접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사무보조를 감당할 역량도 되고 그럴 자세도 갖췄다는 건 의심하지 않지만, 직원들 수고를 덜어주려고 사무보조 인력을 뽑는데 직원들이 어려워서 어떻게 일을 시키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침 행사를 도와줄 아르바이트 인력이 필요하니 거기에 지원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며칠 일했고, 그것으로 일자리 지원할 생각을 접었다.
월요일에 프라하에 도착해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닥치는 상황마다 최선을 다했다. 내가 일을 만들어간다거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착각하기엔 너무 세상을 많이 안 나이가 아닌가. 그저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만 잘 감당하겠다는 마음으로 왔고, 그렇게 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협력을 얻어야 할 상대에게 한 시간쯤 시간을 내어달라고 했는데 점심 식사부터 시작해 네 시간 가까이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상대의 협력을 얻어내려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것이 자칫 상대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어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다행히 상대도 자기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가기 시작한 참이었다.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셈이니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다.
금요일 오전 일정이 남기는 했지만 큰 산을 하나 넘었다 싶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함께 간 후배 직원이 신이 나서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내게 말을 좀 편하게 하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어려운데 말을 놓지 않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직원들도 자기에게 그런 어려움을 털어놓더라면서 말이다. 사실 그 후배 직원은 내 손으로 뽑았고 아들과 동갑이기도 하다. 애써보겠다고는 했는데, 그렇게 되려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행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화약탑 옆에 있는 스메타나홀을 잠깐 둘러봤다. 3월 29일에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와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연주회가 있단다. 세상에. 시간이 맞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틈을 냈을 텐데. 엊그젠가 카우프만이 서울에서 공연했다고 온라인이 시끌벅적하더라만. 불러주는 곳이 많아 좋기는 하겠는데, 그 인생도 참 고달프기는 하겠다. 이렇게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공연이어서 몹시 아쉽다. 이곳에서 그런 연주회를 즐길 수 있을 날이 생기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