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양동에 삽니다
홈리스 행동 생애사 기록팀
후마니타스
2021년 11월 22일
제목에 끌려 독서목록에 올려만 놓았던 책을 1년이 넘은 이제야 읽었다. 매 주일 교회 갈 때 지나는 힐튼호텔 동네 이야기이기도 하고, 쪽방촌 이야기이기도 해서 제목을 보고 곧 독서목록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곳에 쪽방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삼 년 넘게 교회 가느라 지나다니면서도 도무지 그럴만한 곳을 보지 못했다. 듣기만 하고 실제로 본 일은 없다 보니 그곳 상황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오늘에야 비로소 찾았는데, 햇빛이 잘 들어 양동(陽洞)이었던 그 동네는 서울을 대표하는 고층 건물 사이에 들어 있어 밖에서 보이지도 않았고 건물 그늘 때문에 온종일 햇빛 보기 어려운 동네가 되었다.
지금은 남대문로 5가 580번지로 주소가 바뀐 서울역 건너편 이 동네는 6.25 이후 상경한 전쟁 난민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이후 상경하는 이들의 숙박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사창가가 되었고, 1998년 IMF 경제위기 때 빈민 최후의 주거지인 쪽방촌이 되었다. 사창가는 1960년대 말 정리되기 시작했지만 양동은 오래도록 사창가의 대명사로 남아있었고, 재산 가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건물주들의 노력 끝에 1980년 지금의 남대문로 5가로 이름을 바꿨다.
이 지역에 대한 개발계획이 시작된 것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발표됐던 ‘양동 도시계획정비사업’은 집주인과 세입자 갈등으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1979년 힐튼호텔 건축 승인이 나면서 쪽방촌이 일부 헐려 나갔고, 1985년 힐튼호텔에서 열린 IMF 총회 때 임시 주차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또 헐렸다. 40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재개발사업은 2017년 최초 공원이었던 계획이 건물 짓는 것으로 바뀌면서 부동산 광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021년 재개발계획부터 이곳은 용적률이 무려 1,200%을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쪽방촌 주민을 수용하기 위한 공공임대주택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높이가 90미터로 제한되어 있던 것이 개방형 녹지공간을 포함하는 조건으로 2024년 5월 29일 높이가 148미터로 상향 조정되었으며, 이로써 지상 22층이었던 계획이 지상 33층으로 변경되었다. 먼저 계획에는 22층 중 6~18층이 공공임대주택이었으나 변경 계획에는 33층 건물에 근린주거시설이 포함되어있다고만 나타나 있다.
양동 재개발계획이 시급하게 진행되자 활동가들은 이곳을 오래 지키며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구술 생애사’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고, 그 결과 ‘홈리스 행동 생애사 기록팀’ 11명이 2021년 10월부터 8명을 만나며 남긴 기록을 이 책으로 출간했다.
“여덟 살에 양동 쪽방에 들어와 몇 차례 철거를 당하고도 70년 가까이 양동을 지킨 권용수, 늘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방을 잡지만 양동 쪽방촌 내에서 이사를 반복하고 있는 강성호, 오랜 거리 생활 끝에 찾아든 ‘쪼깨만 한 쪽방’이지만 누구보다 널따란 대인관계를 일군 김강태, 양동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한 지 30년 만에 일하지 못한 몸이 된 후에야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전입신고를 한 문형국, 이 동네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염전과 리어카 위 한뎃집을 지나고 온 ‘첫 내 집’이어서 머물고 싶다는 이석기, 개발한다고 쫓아내는 게 불안하지만 안전한 곳을 찾으려면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고 말하는 장영철, 임금보다 주거가 다급했던 머슴살이 끝에 양동에 정착해 딸과의 재회를 꿈꾸는 김기철, 가정 폭력을 피해 찾아든 양동에서 ‘우리 아저씨’와 함께 이웃들을 챙기며 살아가는 이양순.”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도시빈민으로 살았던 경험으로 가난에 익숙해 있었고, 그래서 어지간한 가난에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들은 출생부터 빈곤했으며 가난으로 가정이 깨어져 부모가 온전히 있는 집이 없었다. 교육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그래서 가난을 피할 수 있는 탈출구가 무작정 상경이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빛이 강하면 그늘 또한 그만큼 짙어지게 마련이고. 그 동네를 몇 년이나 지나다니면서도 건물에 가려 존재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도시가 발달하면 점점 보기 좋아지고 쾌적해지는 게 당연한 일 같지만, 그 도시가 돌아가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에 궂은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도심을 떠나지 못한다. 형편에 맞는 집은 그들이 생계를 유지해야 할 일터에서 너무 멀기 때문이다. 그것이 도심에 빈민가가 있을 수밖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 대열에서조차 이탈된 이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50년대생이다.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나이도 되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수급자(기초생활수급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제약이 따른다. 수급자가 되려면 주거지가 있어야 하는데, 노숙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그들 대부분은 그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중 스스로 수급자가 된 경우는 없고, 누군가의 호의로, 어느 단체의 도움으로 수급자가 되었다.
수급자가 되면 한 달에 75만 원 남짓 받는다. 그중 25만 원 정도를 방값으로 내고 나머지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들이 월 25만 원을 내고 살아가는 방은 고작 1.5평(5제곱미터). 그 방값을 국민주택 규모라는 85제곱미터(25.7평)로 환산하면 무려 월 425만 원이다. 그런 방은 그저 좁기만 한 것이 아니다.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하다고 해서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그보다 더 심했다. 나 같은 이들이 많은지 건물마다 “입주자와 관리인 외 출입을 금하며, 위반할 때 주거침입으로 신고한다”는 팻말을 붙여놔서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출입문 사이가 1미터나 제대로 될까 싶었다. 이런 팻말과 더불어 건물마다 화재 대피로를 붙여놨는데, 거기에 표시된 방 숫자가 한 층에 열다섯 개에 이르기도 했다. 그저 일반 주택보다 조금 넓은 정도인데 말이다. 거기에 계단도 있고 공동화장실도 있고 세탁실도 있었다. 상상이 가는가?
오늘 돌아본 골목 곳곳에 무료 급식, 음식 나눔, 의료봉사 공고가 붙어있었다. 공공 일자리 안내도 있었고. 같은 쪽방촌이라고 해도 이곳은 모든 조건이 매우 좋은 편에 속한다고 했다. 교통도 좋고, 복지도 좋고, 주거비도 특별히 비싸지 않다. 이들을 지원하는 공동체도 있어 옹색하지만 씻을 수도 있고 빨래도 할 수 있고 가까운 데 급식소도 여럿 있다. 밑반찬이며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을 떠나면 오로지 수급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움직임이 불편하다 해도 돈벌이 수단이 전혀 없는 건 아닐 텐데, 그런데도 그들이 선뜻 돈벌이에 나서지 못하는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우선 돈벌이가 확인되면 수급비가 끊어진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일하지도 못하고, 일할 때도 동사무소 직원 눈에라도 띌까 전전긍긍한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있어도 일할 수 없는 구조이다. (물론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사기 대출, 대포 통장, 핸드폰 개통과 같은 사기를 당해 금융거래가 불가능하거나, 사기 피의자로 검거 대상이 되어 있기도 하다. 피해액이 수천만 원에 이르고, 수억 원에 이른 이도 있다. 그러니 자기 이름으로 돈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곳에 더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도 그런 기대를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검색을 통해 확인해 본 내용으로는 그들의 희망이 실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선 더 많은 보상을 받으려는 건물주들이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내보내려 하기 때문이다. 오늘 둘러보는데 출입구를 철판으로 막아놓고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안내판을 걸어놓은 걸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건물주가 입주자를 내보내기 위한 이유였다.
이곳의 용적률이 워낙 600%였던 것이 1,200%까지 늘어났는데, 그것은 쪽방촌 세입자를 수용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 들어설 건물도 처음에는 22층 중 6~18층을 공공임대주택으로 할당해 놓았다. 하지만 33층이 된 지금은 공공임대주택은 근린생활시설로 바뀌었다. 계획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설령 공공임대주택이 들어갔다고 해도 과연 쪽방에 살던 이들이 사무용 시설이 같이 들어 있는 33층 건물에 입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교회는 이 쪽방촌에서 길 하나 건너서 있다. 이곳에는 후암동 교동협의회라는 것이 있어 교파를 막론하고 후암동에 있는 교회들이 동사무소와 협력해 지역에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 양동 쪽방촌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양동 쪽방촌 건너에 훨씬 큰 서울역(동자동) 쪽방촌이 있더라. 교동협의회가 생긴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양동 쪽방촌은 주변이 온통 사무실로 둘러싸여 있다.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 뭔가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 눈에는 도움은 그만두고 이들이 재개발이 빨리 진행되어 얼른 지워졌으면 하는 대상으로 비치는 건 아닐까?
이 책이 출간된 2021년 이 동네에 남은 사람들은 200명 남짓하다고 했다. 오늘 돌아보니 한 건물에 쪽방이 적어도 이삼십 개, 많으면 사오십 개는 되어 보인다. 그런 건물이 대여섯 채는 되니 방이 200개 정도는 되겠는데, 일요일 한낮인데도 사람 그림자도 찾기 어려운 걸 보면 출간 당시 보다는 훨씬 줄어든 것이 아닌가 싶다.
대책 없이 ‘배제되는’ 이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엔 새 건물이 들어설 것이고, 언제 그런 이들이 살았나 할 것이고, 내 기억 속에서도 지워지겠지. 그래도 그런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