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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정의를 부탁해

by 박인식

권석천

동아시아

2015년 11월 3일


이십 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출근 시간에 듣던 ‘시선 집중’에 경제 현안을 아주 쉽게 설명하는 이가 있었다. 늘 전화로 연결해 설명하던 이는 권 아무개라는 경향신문 기자였는데, 그 설명만으로 큰 활약을 예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로 관심을 두고 일부러 찾아보기도 했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글을 찾을 수 없었다. 작년엔가 페이스북에 같은 이름을 가진 이의 글이 보였다. 글만으로도 그라는 걸 알아볼 정도여서 확신을 가지고 물어봤지만, 아니라고 했다.


중앙일보에 신문사 논조와 결이 다른 칼럼이 실리곤 했다. 권석천 기자가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기고 몇 년 후 쓰기 시작한 칼럼이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는 한데 논조가 다른 글이니 얼마나 갈까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오래 버텼다. 몇 년 전, 그가 법무법인으로 이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할이 있으니 옮겼겠지만, 그의 글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일전에 그가 쓴 사법파동을 다룬 책은 읽은 일이 있었는데 칼럼을 모아놓은 이 책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발간하고 십 년이 지나서야 읽게 되었다. 아마 칼럼은 거의 읽었다고 여겨서 미뤄두었을 것이다. 읽어보니 생각나는 게 거의 없다. 안 읽었는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그래도 그의 글이라는 건 알아보겠더라. 한참 날이 서 있을 때 쓴 글이니 더욱 그랬을 것이고. 문득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찾아보다가 그가 바로 오래전 시선 집중에서 경제 현안을 설명하던 기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름을 엉뚱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본 모양이기는 하다.


그는 늘 글에서 언론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하곤 했다. 언론이라고 늘 정확한 것도 아니고, 편견을 표명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의도적인 왜곡도 있을 수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언론을 ‘과도하게’ 제한하면 사회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다고 주장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보도, 정치적 의사 표현을 법적 잣대로 과도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 설사 그 주장에 허위가 섞여 있다고 해도 불문곡직 처벌하기보단 진실의 시장에서 거르게 해야 한다. 따져보면 이 중 상당수는 온전히 사회적 비판에 맡겨야 할 사안이었다. 그런 사안을 사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무죄와 위헌을 받게 함으로써 오히려 정당성을 부여했다. 법적 책임에 묻혀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의까지 증발하고 말았다. 차라리 진실의 시장에 맡겼다면 반박과 재반박을 거치며 자연 정화되고 사회도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사상은 자유시장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검찰이 ‘광우병’을 보도했던 MBC <PD 수첩> 제작진을 형사재판에 넘긴 일에 관한 칼럼이었다. 이 글을 읽으니 얼마 전에 읽은 <혐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1977~1978년 스코키 지역 유대인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은 지방공무원들은 처음에는 나치가 원하는 홍보 효과를 피하려고 나치 행진 요청을 허가했다. 법원에서 이 허가 요청이 뒤집혔고, 이 법적 싸움에서 나치가 장기적이고 국제적인 미디어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나치가 계획한 대로 30명이 20~30분 행진하도록 놔뒀더라면 훨씬 더 적은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이 싸움은 나치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표현의 자유를 억제한 결과가 오히려 혐오를 부추겼다는 이 이야기는 사회적 비판에 맡겨 폐기되도록 했어야 할 사안을 법정으로 끌고 가 오히려 정당화시켰다고 한탄하는 그의 글과 맞닿아 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는 큰 기둥인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이런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에는 표현의 자유를 무한정 열어놓는 게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유익하다는 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고,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친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의 본산인 미국은 지금 극우의 확산 속도가 오히려 다른 나라를 앞지른다.


그렇다면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언젠가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더욱 유익하다는 것이 입증되겠지만, 그때까지 치러야 할 대가는 불가피한 것인가? 우리는 지금 이미 경험한 것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데, 그런데도 그것이 더욱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인가?


국회의원들의 불체포특권에 대한 그의 글도 이의 연장선에 있다.


“아무리 국회의원들이 밉다고 해도 그들이 원한다고 해도 불체포특권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의원들이 방탄 국회를 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 약속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만약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방어벽을 하나둘 허물기 시작한다면 언젠가 시민의 기본권도 내려놓게 될지 모른다.”


이 글은 앞선 표현의 자유에 관한 글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물론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은 아니다. 몇 달 전, 근무하던 현장에서 발주처의 요구로 동료 하나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동료이기는 했으나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버거워할 만큼 괴팍해서 내심 잘됐다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발주처에 맞서 그 동료를 지켜냈다. 그가 억울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언젠가 내가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공감 때문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그의 글은 논리적으로 결함이 없다. 하지만 그게 국회의원이라면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누구든 그 자리에만 가면 망가지니 말이다.


그는 공부하던 법학이 싫어서 기자가 되었지만 법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법조기자로 오래 일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칼럼에 유독 법과 관련한 글이 많다. 그의 단독 저서 네 권 중 두 권이 법원에 관한 글이고, 칼럼을 묶어놓은 이 책도 대부분 법과 관련한 내용이다. 그는 판사에게 석궁으로 테러를 가해 처벌받은 대학교수 사건을 다룬 칼럼에서 “유감스럽게도 법은 수학이 아니다. 수학은 숫자와 공식으로 증명되고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세계다. 인간의 욕망과 구질구질한 현실을 다루는 법은 그렇게 명징한 결론을 내지 못한다. 다수설부터 소수설까지 답도 여러 갈래다. 재판에는 한계가 더 많다. 내 말이 분명히 맞는데도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하다면 백이면 백, 지는 게임”이라며 법은 정의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글만 그런 게 아니라 그는 시종일관 그렇게 이야기한다.


지난 몇 달 유불리만을 따져서 법을 만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법을 무시하고, 그 법을 바탕으로 내린 판결 또한 유불리를 따져서 받아들이는 세상을 경험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같아서는 적어도 내 생전에는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을 그런 눈으로 보는 내게 “진실의 시장에 맡기자”거나,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무한정 보장하는 게 궁극적으로 세상을 살리는 길일 것”이라는 그의 말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후배 기자들이 특정 진영의 종군기자가 되고 개별 언론사의 샐러리맨이 되었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과 같은 선배 기자들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공허하기는 다를 바 없다. 앞으로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해는 마시라. 기자들이 자정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유튜브가 등장한 이유로 언론의 경계가 모호해지다 못해 이젠 아예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나 역시 즐겨 듣는 경제 유튜브를 거리낌 없이 경제 방송이라고 부르고, 거기서 취재하는 이들을 기자라고 부른다. 경제 방송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정치로 건너가면 내용의 편향이 문제가 아니라 조회 수로 수입을 올리려는 이들이 허위 조작 방송을 서슴지 않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과연 그들에게서 공정성을 기대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균형 잡힌 방송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여과되지 않은 사견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판에 그들에게서 뭘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방송과 기자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어느 기자와 어느 방송이 공정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쓸 것인가.


문득 그래서, 그런 상황을 내다본 저자가 제목을 <정의를 부탁해>로 지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역설적으로.


그는 김훈의 말을 빌려 “칼럼은 편견이다. 꼭 정답일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을 보여주면 된다”고 말하면서도 “팩트를 논리로 이어가다 보면 이 선을 넘어가도 될까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고 고백한다. 자기검열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면 그가 이 책에 실은 글은 자기검열을 통과한 글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칼럼은 편견이니 그에 구애받지 않고 썼다는 말인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내가 쓴 글을 돌아본다. 나는 어떤 글을 썼나? 자기검열을 거친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것인가? 아무래도 내 맘대로 써온 것 같지는 않다. 자기검열도 자기검열이고 가족 검열도 거쳐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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