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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거래의 기술

by 박인식

도널드 트럼프

이재호 옮김

살림출판사

2016년 5월 25일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미국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겠더니 요즘은 과연 미국을 민주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지경이 되었다. 그동안 민주국가의 표본으로 여겼던 미국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시작은 트럼프의 사우디 방문이었다. 당시 트럼프의 사위인 쿠슈너가 트럼프의 사우디 방문을 주도하고, 사우디 왕세자와 사적으로 연락하며, 중동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백악관 선임고문이라는 직함이 있기는 했지만, 대통령의 사위라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는 그에게 어떻게 세계 정치 지형을 바꿔놓을 수 있는 중책을 맡긴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쿠슈너는 결국 사우디 왕세자에게 30조 원에 가까운 투자를 받아냈다.)


십수 년 사우디에서 야비하기 짝이 없는 미국인들에게 부대끼면서 그래도 그들을 존중했던 것은 최소한 겉으로는 인종차별과 이해충돌을 절대 넘어서는 안 될 금기로 여기는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드러내놓고 지적할 일만 없었을 뿐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런 나라의 대통령이 인종차별에 이해충돌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게 뭐가 문제냐며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는 걸 보고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걸 그대로 용납하는 미국인들의 정서였다. 우리나라였으면 쫓겨나도 몇 번이나 쫓겨날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지 아직 백 일도 안 되었는데 트럼프 때문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법을 무력화하고 상식과 질서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런 결정이 치밀한 계산 아래 이루어졌다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겠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보면 정책 검토는 물론이고 계산도 없고 생각도 없이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같아서는 앞으로 몇 달을 못 넘기지 싶다. 하지만 몇 달 넘기지 못하고 쫓겨난다는 데 내기를 걸지는 못하겠다. 나름 타고난 승부사 기질은 갖추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와서 저럴 수 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지가 궁금한 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 수 있는지 궁금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일흔여덟인 그가 마흔하나였던 1987년에 썼다는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책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고, 발간되고 32주 동안 뉴욕타임스 논픽션 베스트셀러 1위를 지켰으며, 2016년 미국 대선 기간 다시 세계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2004년에 이어 2016년 재발간되었다.


발간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 책이 놀라운 판매 기록을 세우는 이유를 젊은이들의 꿈과 이상이 트럼프의 이미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책의 역자는 번역본 초판 발간 당시 “본능적인 그의 거래 능력과 완벽한 일 처리, 쓸 사람과 안 쓸 사람을 가려내는 그의 안목, 이에 앞서 한 인간이, 그것도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재벌이 어쩌면 이렇게도 꾸밈없이 자신의 모든 것은 내보일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더 강하게 가슴에 와닿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그의 거래 능력과 사업 스타일을 참고해서 더 큰 발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번역본 재발간 당시 역자는 트럼프를 ‘막장 골퍼, 시도 때도 없이 막말이나 하고 허세나 부리는 억만장자 정치인, 도를 넘은 막말, 강하고 빈틈없고 야비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자 타고난 승부사, 영리하고 치밀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대선에서 힐러리와 벌일 싸움은 ‘역대 어떤 선거보다 치열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2년 사이에 그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극적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까지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냉정하고 영리하고 치밀한 타고난 승부사’라면 오히려 낫겠다.


자서전이니 자화자찬이 따르는 건 응당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가 사업을 추진해 가는 방식은 어떤 면으로든 탁월한 건 사실이다. 말도 되지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전략을 거침없이 구사했기 때문이다. 코모도 호텔을 사들일 때 이야기이다.


“호텔을 틀림없이 살 것이라는 인상을 줘서 되도록 상대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시기는 늦추고, 전문 경영인을 동업하자고 설득해 (고용하지는 않고) 은행 융자 심사를 유리하게 만들고, 뉴욕시 공무원에게 호텔에 수천 개 일자리가 생기면 시의 세수 확보에도 도움이 되고 시민들의 높은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니 파격적으로 세금을 감면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만한 것을 얻기 위해서 그가 지불한 비용은 보이지 않는다. ‘봉이 김선달’이 울고 가겠다. 그는 팜비치에 1억2천만 달러를 들여 지은 콘도미니엄 2동을 4천만 달러에 사자고 덤벼들었고, 자기가 좋아해서 그곳에 가면 항상 묵었던 호텔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요구하는 값보다 훨씬 싼 값에 살 수 있을 때만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했으며, 그의 저택으로 유명한 ‘마라라고’는 2천5백만 달러에 매물로 나온 것을 5백만 달러에 샀다.


오해는 말기 바란다. 인용한 문장은 그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자는 것이지 그를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사실 나 같은 일반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이고, 비록 불법은 아닐지 몰라도 불법적인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고, 그러면서도 (다른 대기업들이) 그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그런 큰돈을 벌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질문도 생긴다.


그는 또한 매우 실용적인 면이 있는데, 내게 반대했던 사람도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배척하지 않는다. 그래서 횡령을 적발하고도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해고하지 않았다. 그 쓸모가 비록 불법적인 일이기는 했지만. (요즘에는 반대했던 사람을 언제건 해코지하고 말더라 마는) 사람들이 자기를 찾는 건 자기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그에 응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기 때문에. 기자들이 쫓아다니며 자기 사진을 찍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이 필요하다면 그것에도 기꺼이 응한다. 사생활 이야기하는 게 싫지만, 거래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기꺼이 감당한다. 그가 내세운 경영의 단순한 원칙 하나는 “경쟁사로부터 가장 우수한 사람을 빼 내와 더 높은 대우를 한다”는 것인데, 언짢기는 하지만 비난할 일은 아니겠다. 더 높은 대우는 그만두고 그냥 걸맞은 대우만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대우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는 도박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데, 그것은 도박을 반대하는 논리가 너무 위선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뉴욕 증권거래소를 세계에서 가장 큰 도박장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 증권거래소야말로 세계 최대의 도박장인데, 세계 모든 카지노에서 오가는 판돈보다 더 많은 돈이 거래되는 도박장인 증권거래소가 합법이라면 불법 도박 또한 마찬가지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따라 읽다 보면 차츰 그의 주장이 그럴듯하게 여겨지는데, 그래서인지 이 주장도 딱히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렵다. 사실 증권거래가 투자인지 투기인지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그는 기자들을 속이거나 변명하지 않는다며 자기에게 씌워진 굴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다. “나는 기자들을 속이거나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딴소리를 할 뿐이다.” 말하자면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는 것이지.


이쯤 되니 나 역시 그의 주장에 하나씩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 책의 상당 부분이 지금 보이는 그의 모습에 맞닿아 있는데, 어떻게 뉴욕타임스 같은 신문에서 “많은 젊은이들의 꿈과 이상이 트럼프의 이미지와 일치하기 때문에 이 책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분석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12년 사이에 트럼프에 대한 평가가 극적으로 달라진 역자는 지금 트럼프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트럼프는 과연 성공한 기업인인가? (어느 미국 유수의 언론에서 그가 운영하는 기업이 껍데기뿐이라고 평가한 사례도 있더라 마는) 성공하고 싶다면 그가 주장한 성공의 방정식을 온전히 따르면 될까? (남의 약점을 내 이익으로 취하는 방식을 포함해서) 꿩 잡는 게 매라고, 부를 일구는데 합법과 불법을 가르는 게 부질없는 일일까? 합법과 도덕과 상식만으로 부를 일구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어떻게 미국에서 공적인 지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걸 저렇게 보고만 있는 것일까?


책 읽으면서 궁금증이 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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