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23

by 박인식

오랜만에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스물세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조선시대 생활사와 경제사를 연구하는 정진영 선생의 <조선 시대 양반과 선비>를 읽었습니다. 평소에 궁금해 하던 조선시대 생활상의 한편을 엿볼 수 있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내용을 다룬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른 한편에 속하는 평민과 천민의 생활상이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좋은 책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링크는 아래에 올립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클릭 한 번...


♣♣♣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

정진영

산처럼

2024년 4월 25일


역사에 관심을 두는 데는 여러 이유와 당위성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그저 호기심에 이끌려 역사책을 읽는다. 그러다 보니 역사가 갖는 함의만큼이나 당시의 소소한 생활상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 유배된 사람이 집에다 편지를 보냈다는데 누가 그 편지를 전해줬는지, 유배지에서 의식주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관직에 오른 사람은 몇 되지 않는데 그 많은 양반은 뭘 해서 먹고 사는지, 요즘에도 집집이 선조가 어떻고 가문이 어떻다고 하는데 그러면 천인의 후손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이런 궁금증을 늘어놓으니 어떤 분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거라면서 이 책을 소개했다.


조선시대 생활사와 경제사 연구자인 저자는 조선 초기에는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다가 양인 가운데 벼슬아치는 양반으로 나머지는 평민으로 분화되었는데, 17세기에 이르러 양반과 평민 사이에 전문 직종을 가진 관청의 행정 실무 담당자를 중심으로 한 중인이 생겨나면서 양반, 중인, 평민, 천인 네 종류의 신분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또한 성씨는 양인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중반 호적 대장에 따르면 성이 없는 사람이 반 이상이었다가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비로소 모든 사람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반이 넘었다는 천인은 어떤 과정을 거쳐 성을 갖게 되었을까? 우리나라 최초 족보인 안동 권씨의 <성화보>에 서문을 쓴 15세기 인물 서거정은 “우리나라에는 원래 족보가 없어서 거가대족이라도 몇 세대가 지나면 조상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는데도 후대로 오면서 족보에 시조와 윗세대에 대한 기록이 오히려 정연해지고 구체화하였다. 족보 상당 부분이 허위이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정조 때 인물인 정약용은 정승의 후예라고 하는 천민이 한둘이 아니어서 처벌할 수 없을 정도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번 이사하면서 없어지기는 했지만 우리 집에도 족보가 있기는 했다. 남해 어딘가에 있다는 큰집을 찾아가서 어렵게 나누어오신 것이었다. 그것을 내게 설명하며 상기되셨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지만, 당시에도 그게 그다지 미덥지는 않았다. 우리 가문의 시조가 조선 중기쯤 인물이셨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도 그랬지만 이 책에서도 당시에는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하니 확률로 보면 그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나.


저자는 양반이 대체로 토지가 많고 명문가의 경우 노비가 오륙백 명에 이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오륙백 명이라는 엄청난 노비를 어떻게 거느렸을까 싶기는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그중 주인집에 살면서 주인의 수발을 드는 솔거노비는 이삼십 명, 많아야 사십 명 정도였다. 나머지는 외거노비로 주인집 땅을 경작해 결실을 주인집과 나누거나 양식을 받는 상호 의존적인 주종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주인집과 가까운 곳이 살지만 타지로 떠난 경우도 많고, 주인집에서 양식을 받거나 땅을 받지 않고 알아서 자기 살림을 꾸려가면서 주인집에 몸값을 내는 경우도 많았다. 나중에는 아예 바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니, 요즘 직장인과 딱히 차이도 없어 보인다. 지금 우리 형편과 별로 다를 것 없는. 그러니 선조가 성을 가진 양반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다지 기죽을 일도 없겠다.


이처럼 천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은 지경에 이른 것은 종천법 때문이었다.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천인이면 그 자식은 천인이 된다는 법인데, 이는 양반이 노비를 늘려 자신의 경작을 늘리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노비가 되면 세금과 균역 대상에서 벗어나니 결국은 나라가 파탄 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좀 더 많은 양인을 확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물론 모든 양반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벼슬에 나가지 못해서 혹은 자식이 많아 유산으로 받을 수 있는 재산이 줄어들면서 경제적으로 곤궁한 양반도 많았다.


최근에 18세기 말엽 지식인이었던 김려의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다.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유배 생활을 하던 그는 유배지에서 <사유악부 思牖樂府>와 <우해이어보 牛海異魚譜>를 썼다. 유배지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그에게도 가족이나 친지에게서 오는 편지는 큰 기쁨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유배지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집에 갇혀 사는지 유배지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지, 식량은 어떻게 조달하는지, 가족이나 친지가 방문할 수는 있는지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유배가 고통스러운 것이기는 해도 사실 유배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배는 양반이나 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도 잡범이나 파렴치범이 아니라 정치범이었으니 양반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벼슬이 있어야 유배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범은 세상이 바뀌면 오히려 더 큰 권력을 쥐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유배 가는 길에 있는 고을 수령이나 유배지를 관할하는 수령은 죄인이라고 해서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유배 가는 길목마다 친척이나 친지들이 나와서 여비를 부조하거나 술을 대접하기도 했고, 유배 길목의 수령이 마중 나와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여행경비와 필요한 물품을 바치기도 했다.


유배된 죄인들은 가족이나 노비와 함께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족이 함께 살려면 집을 빌리거나 새로 지어야 하니 이를 관아에서 돕기도 했고 데리고 간 노비를 부려서 짓기도 했다. 유배지 수령은 죄인이 기거할 집을 짓거나 주인집을 정해서 그곳에서 기거하게 했다는 걸 보면 적어도 죄인 스스로 기거할 집을 장만하지는 않아도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유배 생활이 그렇게 각박하지는 않았더라는 말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저자의 어조로만 보자면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집에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유배지에서 편지를 보내는 것도 과히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조선시대가 양반의 사회였다고 정의한다. 양반이 국정을 주도하고 세상을 이끌어 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유학이 있었다. 유생은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이들은 과거 공부나 하는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정치활동을 하는 정치의 주체였다. 하지만 조선 초기부터 유생의 정치활동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정치구조가 공론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중앙의 정치세력이 광범위한 공론을 토대로 집권 명분을 얻으려고 유생을 부추긴 것이었다. 유생들은 특히 민의를 임금에게 전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서는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을 소(疏)라고 했는데 이중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 상소(上疏), 특히 유생이 올리는 것을 유소(儒疏)라고 구분해 재야공론으로 받아들였다.


유소는 공론성 확보라는 면에서 다중의 참여를 전제로 했다. 소회(疏會)를 열고, 실행을 담당할 소임(疏任)과 우두머리인 소수(疏首)를 뽑고, 사무실인 소청(疏廳)을 마련했다. 유소를 올리기 위해 수십 명 많게는 백여 명이 한양에 올라갔고, 이를 승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 연좌농성을 이어갔다. 18세기 이후에는 성균관을 장악한 노론이 남인의 당론을 따르는 영남의 유소를 받아들이지 않자 영남 유생 만 명이 참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준비해 이를 돌파하려고 했다.


말이 쉬워 만 명이지 그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데 드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저자는 당시 상황을 감안해 이에 소요된 경비가 적어도 1만 냥은 넘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당시 논 330마지기, 쌀 2천 석에 해당한다니 지금으로 치자면 서울의 소형 아파트 값에 버금가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런 엄청난 인원과 비용을 써가며 올린 만인소의 주제는 1792년 사도세자 신원, 1855년 사도세자 추존,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반대와 같이 민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이런 현상은 단지 유생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영남 사림세력을 이끌어가던 남명 조식은 수시로 상소를 올려 적신 정치를 극렬하게 비판했고 국가와 사회의 기강 문란과 인사제도 문제와 국고 탕진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절절히 역설했다. 하지만 그가 대책이라고 제시한 것은 군주가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실 인식은 정확했고 비판도 엄정했지만 대책은 매우 추상적이었다. 오죽하면 율곡 이이가 조식을 일러 “학문을 함에도 자기 의견이 없고 소장에도 경제에 대한 대책이 없어 비록 그의 정견이 시행됐다 해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지는 미지수”라고 할 정도였다.


조선은 양반, 중인, 평민, 천인으로 신분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직업도 사농공상으로 차별했다. 먹고 사는 일을 하는 이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지배받는 세상이라서 오백 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는지 그런데도 오백 년이나 존속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선은 양반의 시대라고 정의할 만큼 사회가 양반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고 평민이나 천인이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니 어쩌면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한 조선시대의 사회상은 전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양반의 삶이 아닌 그들만의 삶이 세상의 더 큰 흐름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조선시대의 생활상이 궁금해 찾아 읽었던 책을 덮으며 혹시 문헌의 기록이 아닌 방법으로 시대상을 추정해볼 방법은 없을까 궁금해졌다.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22

31264_12891_4016.jpg


https://www.firenzedt.com/news/articleView.html?idxno=3126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거래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