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24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스물네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고, 십수 년 경험한 사우디아라비아를 다룬 책입니다. 저자인 캐런 엘리엇 하우스는 80년대 초반부터 중동을 취재한 베테랑으로, 당시로서는 드문 여성 기자였지만 그래서 남녀 부동석의 사우디에서 남성 기자로서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던 여성에 대해, 그리고 취재 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빈곤층에 대해 깊이 있는 취재를 벌일 수 있었지요.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 말고도 많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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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캐런 엘리엇 하우스
서정민 해제
빙진영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6년 8월 25일
사우디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데 사우디에 관한 기사나 자료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중동 최대 산유국이라는 정체성 하나로 사우디를 정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긴 직장인으로서 마지막 순간을 잘 마무리해보겠다고 사우디 현지법인에 부임했던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부임하기 전에 사우디나 중동 경험자들에게 조언도 받고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열심히 찾아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었던 건 책 몇 권이 전부였다.
부임해 보니 사우디에 관한 지식은 그곳에서 일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 이후로 부족한 이해를 만회하려고 눈에 보이는 대로 읽고 또 읽었다. 이 책도 그중 하나였다. 번역서로 읽은 건 2016년이지만 원저는 그보다 훨씬 전인 2012년에 발간되었다. 처음 읽고 8년이나 지난 지금, 그 책을 처음부터 아주 꼼꼼히 다시 읽었다. 그러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처음 읽을 때는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읽고 이해한 것은 알고 있었고 관심 두었던 딱 그만큼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인 캐런 엘리엇 하우스는 이미 칠십 중반을 넘긴 은퇴 기자로 80년대 초반부터 중동을 취재했고 그것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 편집장을 거쳤으며 은퇴하기 직전엔 발행인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저자가 누구인지도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저 텍스트만 건성으로 훑었던 모양이다. 최근에 확인할 것이 있어 다시 읽었는데 그러면서 비로소 이 책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드문 여성 기자였지만 그래서 남녀 부동석의 사우디에서 남성 기자로서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던 여성에 대해, 그리고 취재 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빈곤층에 대해 깊이 있는 취재를 벌일 수 있었다.
사우디에 첫발을 디딘 후 지금까지 여러 책을 읽고 틈나는 대로 인터넷을 뒤졌지만 사우디 여성과 빈곤층에 관해 정리해놓은 것으로는 아직 이만한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일부다처제의 당사자인 여성을 만나며 남편을 공유하는 여성들이 한집에 살면서도 서로 왕래하지 않는 모습을 목격한다. 남편을 공유하는 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알라의 뜻으로 알고, 그래서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놀란다. 그리고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집을 높은 담으로 둘러치는 것이 결국은 여성을 가둬두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왕족이든 평민이든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여성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니다. 저자는 선지자 무함마드가 첫 부인인 카디자 생전에 다른 부인을 두지 않았고, 당시에는 여성이 모스크에서 설교를 들을 수 있었고 심지어 전쟁에도 참여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여성 차별이 쿠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으로 사우디 인권위원장에 오른 이의 입을 통해 “사우디 종교 지도자들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건 사실이 아니며 선지자 무함마드는 항상 카디자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확인한다.
저자는 1970년대 말 이전이 훨씬 자유로웠다고 전한다. 아마 “1979년 무장단체의 메카 대사원 점거사건 이후 사우디가 원리주의로 급선회”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2017년 권력 전면에 나서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1979년 이전의 사우디’를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 기억하는 것이 다르고 검색으로는 이를 확인할 만한 정황을 찾기 어려웠다. 일례로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왕세자는 1979년 이전에 여성이 운전했다고 말한 데 반해 왕세자에 의해 피살된 카슈끄지는 자기는 당시 여성이 운전하는 걸 보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저자는 1980년대 초반부터 중동 취재를 시작했으니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겠지만, 당시로서는 불과 몇 년 전 일이어서 충분한 증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기록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는 압둘라 국왕이 재위하던 2009년에 사우디에 부임했는데, 부임하던 해에 여성 차관을 임명해 화제가 되었다. 이어서 남녀공학인 KAUST 과학기술대학을 세우고 국왕자문기구인 슈라위원회에 여성 의원을 임명하는 등 여권 신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저자는 압둘라 국왕이 여성 운전을 허용하고 싶어 했지만 국민 85퍼센트가 반대한다는 여론에 충격을 받고 계획을 포기했다는 뒷이야기도 들려준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일이다. 당시 나이 든 여성들이 여권 신장에 앞장서서 반대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전하는 사우디 빈곤층의 현실은 예상보다 더 열악하다. 전체 사우디 가구의 40퍼센트가 한 달에 850달러 이하로 생계를 유지하고, 19퍼센트에 달하는 극빈층은 480달러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부 보조금이 소득의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며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한다고 해도 평균 다섯 명이 넘는 가족이 한 달을 살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부자나라로만 인식하고 있는 사우디, 어렵고 위험하고 지저분한 일은 모두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맡긴다는 사우디의 이면에 이런 빈곤층이 있다는 건 놀랍다. 물론 이 책이 발간되고 이미 12년이 흐른 터라 많이 개선되기는 했겠지만, 그간 빈곤 문제를 해결할 만한 계기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니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사우디에서 일하던 13년 동안 신문에서 빈곤층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없었다. 사우디가 언론 통제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외국 언론사도 많은데 왜 그런 기사를 찾을 수 없었을까? 그러고 보면 사우디에 대한 보도는 산유국과 이슬람 종주국과 시장으로서의 사우디에 치중해 있었고, 그 때문에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같은 사회적 그늘에 대한 취재가 드물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빈틈을 저자 특유의 감수성으로 찾아낸 것이고.
사우디 정부 발주사업을 수행하던 내게 공사 대부분이 지연되고 예산이 늘어난다는 언급은 너무 익숙한 모습이다. 저자는 2011년 프로젝트 관리자와 감독관 3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제때 종결하지 못한 정부 사업이 97퍼센트이고 예산을 초과한 게 80퍼센트에 달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더 큰 문제는 공무원들이 이에 대해 아무런 잘못도 인식하지 못하고 막대한 국가적 낭비를 걱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그중 하나가 리야드의 프린세스 누라 대학인데, 2008년 40억 달러 예산으로 시작한 공사가 2011년 개교 당시 53억 달러로 33퍼센트 초과했다. 늘 있는 일이었으니 내겐 새로울 것도 없다.
2010년 중동에서 ‘아랍의 봄’ 사태가 일어났을 때 사우디 정부는 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병 치료를 위해 외국에서 머물던 압둘라 국왕이 급거 귀국해 사회 전 분야에 엄청난 돈을 뿌렸다. 당시 뿌린 자금의 규모는 모르고 있었는데 저자는 그것이 수천억 달러에 달했다고 증언한다. 공무원 최저임금을 도입하고 2개월분 보너스를 지급하고 무려 12만6000개 일자리를 단기간에 창출했다. 그 덕분에 ‘아랍의 봄’이 사우디를 피해가기는 했다. 하지만 저자는 그 후유증이 엄청났다고 지적한다. 젊은이들이 민간부문 생산직 취업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고, 2004년에 비해 공공지출이 3배 상승했고, 비석유 부문 GDP는 정체되었다. 그뿐 아니라 사우디인의 특권의식을 강화하고, 불공평한 부의 분배에 대한 적대감을 높였으며, 국민의 권리를 왕가의 호의로 포장해 많은 사우디인이 굴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저자가 서술한 것 중에 사우디에 십수 년을 근무하면서 깨닫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다. 오늘날 사우디는 통일국가의 면모보다는 부족, 지역, 이슬람 분파의 집합체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사우디는 크게 사우드 왕가 발원지인 리야드를 중심으로 하는 네지드, 사우디 최대 항구인 제다와 성지 메카를 아우르는 헤자즈, 시아파가 모여 사는 동부, 예멘에 뿌리를 둔 아시르로 나뉜다. 그런 상황에서 저자는 “헤자즈 사람들은 네지드 사람들이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그들의 관습과 종교관을 모든 국민에게 강요한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석유가 풍부한 동부지방의 시아파 사람들은 와하비즘이 삶을 지배하며 차별이 만연하는 사실에 분개한다. 예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시르 사람들은 예멘과 가깝다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하는데 이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가깝다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하는 북부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또한 부족 충성심 또한 국민을 분열시키는 요소인데, 실제로 부족 간의 결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사촌을 결혼 상대로 가장 선호한다. 사우디인들은 억양이나 이름으로 다른 부족을 쉽게 구분한다.
사우디인들이 이렇게 분열되고 서로와 반목하는 줄은 미처 몰랐지만 생각해보니 의아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사업 추진을 위해 사우디인들을 만나고 와서 파트너에게 이야기하면 간혹 그 사람과는 더 이상 관계를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그저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름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사우디인들의 삶에서 분열은 일상 요소이며, 이 네 지역민의 분열 특성은 오늘까지 이어진다”고 표현한다. 그곳에서 일할 때는 의아해하기만 했고 그것이 분열로 이어지고 고착된다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동안 겪은 난관 중 몇 개는 피해 갈 수도 있었겠다.
저자는 내용 중 상당 부분을 3대 파이살 국왕에 할애하고 있다. 우리로 치면 세종대왕쯤 되는 성군으로 여겨지는데, 앞으로 관심을 두고 살펴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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