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소설 <찬란한 타인들>

by 박인식

찬란한 타인들

유이월

자유문방

2022년 12월 17일


전자책 서가를 정리하는데 낯선 제목이 보였다. 소설책이었는데, 제목뿐 아니라 작가도 낯설었다. 얼마 전부터 전자책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어서 구독 목록 중에서 고르다 잘못 클릭한 게 아닐까 싶었다. 확인해 보니 작년 11월에 구매한 것이었다.


필요해서 읽기도 하지만 대체로 소개를 보고 책을 고른다. 하지만 읽을 마음이 생긴다고 바로 책을 사지는 않는다. 구매목록에 올려놓고 한두 달 묵혔다가 사는데, 바로 샀다가 후회한 일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뭔가에 단단히 꽂혔던가 보다.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이었던 걸 보면 두고 볼 책은 아니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분명 번역본은 아닌데 등장인물을 비롯한 배경이 모두 미국이었다. 원고지 스무 장 내외의 짧은 소설 서른 편이 실렸고, 11문장에 불과한 <강아지 모리>라는 소설도 있었다. 길이로 보면 엽편소설이기는 한데 딱히 반전이랄 것도 없어 읽으면서 이게 뭐지, 왜 이 책을 골랐을까 했다. 두어 편 읽고 그만두려는데 눈에 들어오는 글이 하나 있었다.


“매주 월요일에 배달되는 식사 서비스는 4대 영양소가 고루 함유된 곡물음료 파우치였다. 2028년부터 5대 영양소 중 지방을 제외한 4대 영양소만 함유되었는데, 이는 뇌에 꼭 필요한 영양성분인 지방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인공지능으로 인간이 뇌를 사용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술과 장미의 나날들)


흥미가 느껴졌다.


“그들은 이별의 시점을 합리적으로 가늠해 보기로 했다. 지난 연애의 평균 지속 기간, 현재의 자산 규모, 미국과 중국의 외교 동향, 지구 온난화 현상, 그들이 사는 미주리주의 미혼 남녀 비율, 다른 주와 해외 여행객 유입량 등을 토론했다. 그들은 명석했으므로 이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요인을 최대한 고려했다. 시간을 들여 계산해 본 끝에 도출해 낸 적절한 기간은 837일이었다. 837일은 그들을 둘러싼 모든 조건을 감안한 안전한 이별 날짜였다. 하지만 837일 이전에 사랑이 끝나는 쪽이 있더라도 마음을 감추고 그 이별 일수를 채우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영원까지 갱신되는 것으로 했다. 그들은 약속이 주는 안정감에 취한 채로 함께 건배했다. 그리고 지칠 때까지 술을 마셨고, 잠들 때까지 섹스를 했다. ... 매케했다. 기침을 하고 깨어났을 때는 사방이 연기로 자욱했고 아파트는 이미 반쯤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 여자는 다리에 3도 화상을 입었고 남자는 아파트를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했다. 그들은 만난 지 19일 만에 영원히 이별했다. 계산했던 결과의 오차 범위에도 들지 못했다.” (찬란한 날들)


이쯤 되니 나머지 글들이 궁금해졌다.


“찰스가 만들어 낸 수명 계산기의 적중률은 97퍼센트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물건을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했다. 수명을 안다는 것이 실용적이랄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달라지는 부분은 있었다. 사람들은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잃었다. 용도나 의미보다는 수명이라는 틀로 그 물건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물건을 보면서 ‘그건 얼마나 쓸 수 있대요?’라고 물었다. ... 어느날 페기가 7년째 의식이 없는 상태인 남편을 들것에 싣고 왔다. 남편의 수명은 그로부터 8일 후인 것으로 계산되었다. 찰스는 그 결과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러주었다. ... 그녀는 남편을 태우고 플로리다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찰스 호킨스 이야기)


읽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을까? 죽을 날이 언젠지 궁금해하지 말라는 말이었을까? 그걸 알았을 때 오는 혼란스러움을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을까? 여드레 후면 죽을 남편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는 아내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클로이는 친구들을 인형으로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는 관찰력이 뛰어나 상대방의 특징을 빠르게 잡아낼 수 있는 기술이 있었지만 킨의 이미지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클로이는 다른 이의 인형에 집중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 킹이 떠올랐다. 풀지 못한 수학 문제처럼 까다롭고 짜증스러웠다. 아무래도 한 번 더 그를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 클로이는 분한 마음이 들었다. 핑계를 만들어 찾아갔는데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토록 킨의 특징을 잡아내기 어려운 것일까. ...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킨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클로이는 한동안 알아내지 못했다. 첫눈에 반해 그의 모든 특징을 좋아하게 되는 바람에 결코 하나로 간추릴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킨의 눈동자)


이 정도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배님은 위선자예요, 아세요? 사회 불평등 문제에 대해 옛날에 우리가 서로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선배님은 아무런 고민 없이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서 이렇게 잘 살고 계시고, 흙수저인 저는 이렇게 일자리 구하러 다니고. 뭐 하러 그렇게 날밤새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했나 몰라. 정말 웃겨. 저 이만 가 볼 게요.’ 문영은 3년을 훌쩍 넘는 구직 활동 끝에 백기를 들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회사에 오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철학에 반하는 다소 비굴한 선택이었지만, 당시의 문영은 몹시 지쳐 있었다. ... 자기 삶에 만족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수많은 불일치의 요소들을 우연히 일치시킬 수 있었을 때, 혹은 그것들을 방치하기로 완전히 결정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의 배짱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주어진 불행을 좀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것뿐이라고 문영은 생각했다.” (바우만과의 월츠)


삶 가운데 마주치는 불일치의 요소들이 우연히 일치할 확률이 매우 낮을 것이니, 결국 불일치를 일치시키는 노력이 부질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이들을 대신 변명해 주는 것인가? 그 질문에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내 글은 아이러니에 대한 각종 예찬이다. 세상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고 순수한 감정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굴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기도 하고 어떤 것을 바라면서 동시에 바라지 않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얼마쯤 논리적이고, 얼마쯤 정의로우며, 얼마큼의 선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생각만으로 논리적이고 생각만으로 정의로우며 선한 심성조차 생각에 그친다. 결국 이 ‘바우츠만과의 월츠’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은데, 왜 유독 이 작품만 등장인물과 배경이 한국인 것일까. 거기에도 무슨 의미를 담아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던 것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 소설인데 왜 미국 이름과 미국 지명을 사용했는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똑같은 사건도 다른 외투를 입히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고, 또한 인생의 중요한 시기 10년을 미국에서 보낸 내가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할 만큼 한국 사회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년 경력의 프리랜서 출판 편집자 두 사람이 함께 차린 출판사에서 꼬박 일 년을 별러 찾아낸 첫 책이다. 편집자는 그에 대해 “원고는 훌륭했고, 저자의 분명한 ‘자기의 이유’가 담겨 있었다”고 말한다.


분명한 작가의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고 작가나 편집자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덮으려던 책을 다시 읽게 만든 힘이 있었고, 덮고 나서도 여운이 길게 남는 책이기는 하다. 작가가 궁금해 찾아보니 책 소개에 실린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글과 관련된 여러 직업을 거쳤다. 결혼 후 미국에서 10년간 거주했으며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아이를 키우며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전부이다. 꾸준히 읽고 꾸준히 쓴다니 언젠가 그의 이름으로 된 책을 만날 수도 있겠다.


나는 소설은 이야기로만 읽기는 하지만, 유이월의 글이 내가 읽는 이야기로서의 소설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의 소설을 만나게 된다면 다시 읽을 것 같기는 하다.

Noname.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우디아라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