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봄호
내가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긴 글에 서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북리뷰’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후퇴하게 만든 게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서평 전문지 ‘서울리뷰오브북스’였다. 앞서 ‘런던리뷰오브북스’와 ‘뉴욕리뷰오브북스’가 이미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성과가 이에 미치지는 못해도 보스턴ㆍ시카고ㆍLAㆍ샌프란시스코 같은 미국 도시 말고도 시드니ㆍ파리ㆍ토론토에도 같은 이름의 서평 잡지가 발간되고 있다.
창간호부터 챙겨보고 있는 ‘서울리뷰오브북스’에 실린 서평은 오히려 평가 대상인 책보다 더 넓고 더 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글을 읽었는데 책 줄거리 요약하고 거기에 감상 몇 줄 더한 걸 어떻게 서평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올 봄호 또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난 연말 엉뚱한 계엄의 영향이 이 잡지에까지 미쳐 이번 봄호는 헌법에 초점을 맞췄다.
이번 호에서는 박혁의 <헌법의 순간>을 유정훈 변호사가, 이철희의 <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이용우 민주당 21대 국회의원이, 헤린더 파우어 스투더의 <히틀러의 법률가들>을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이황희 교수가 서평을 발표했다. 그저 감탄하며 읽었다. 구구절절 버릴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정훈 변호사가 읽은 <헌법의 순간>은 제헌헌법이 발의되어 의결할 때까지 20일 동안 심의하고 통과시킨 과정을 기록한 회의록의 주해라 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라고 규정한 제헌헌법 제16조에 ‘적어도’라는 문구가 들어간 과정, 무상의 범위에 관한 의원들의 논쟁 역시 인상적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현행 헌법 제31조를 찾아보니,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는 내용 외에도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라는 조항이 있다. 치열한 논쟁을 거쳐 제헌헌법에 들어간 ‘적어도’라는 세 글자는 지금도 우리 헌법의 일부이다.”
“무상 교육 범위에 관한 대부분의 쟁점에 관한 논의는 제헌헌법 당시 이미 치열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무상 의무교육이라는 원칙과 신생 국가의 국력이라는 제약 사이에서 헌법의 기초자들은 ‘적어도’라는 문구를 넣음으로써 무상 의무교육에 관하여는 앞으로 나아갈 일만 있어야지 후퇴나 축소는 없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제헌국회라면 먹고살기 막막한 때였을 것인데, 그때 이미 모든 국민은 ‘적어도’ 초등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것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한국이 전례를 찾기 어려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게 결코 우연한 결과일 수 없다는 말이다.
서평자는 개헌이 화두가 된 지금 사회를 향해 다음과 같은 당부를 남기는 것으로 서평을 맺고 있다.
“1987년 헌법의 한계에 대해서는 꾸준히 문제가 제기되고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개헌이라는 중대 사안을 앞에 두고 현실의 문제점에 반응하고 권력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 논의하기에 앞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개정하려는 것인지부터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호에서 가장 관심 있게, 두 번씩이나 읽은 글이다. 길지만 하나 버릴 것 없어 서평자의 주장 거의 전부를 인용한다.
“탄핵은 본래 법적이고 헌법적인 절차지만, 그 도입 배경에는 강력한 정치적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 권력 간 균형을 잡기 위한 제도적 수단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즉, 탄핵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으로 의회에서의 탄핵소추 의결은 정당 간의 균형과 정치적 계산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다수당이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거나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탄핵이 민주적 책임성을 높이는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도구로 오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정치란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정하여 갈등을 줄이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탄핵은 정당 간의 극심한 갈등을 초래하고,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협력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탄핵 위기에 처할 경우, 국가 운영이 마비되거나 중요한 정책 추진이 중단될 위험이 생긴다. 또한 탄핵은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대신, 문제를 법적 영역으로 넘기며 정치권의 책임 회피를 초래할 수 있다. 정치적 논의와 타협 대신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에 의존하면,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기능이 위축될 수 있는 것이다. 국민 여론을 둘로 나누고, 정치적 분열과 대립을 심화하고, 특히 탄핵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추진되었을 경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신뢰를 악화할 위험이 증폭되고 사회적 분열을 가속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탄핵은 민주 헌정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가 필요하다고 이철희는 주장한다. 탄핵은 헌법과 법치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극약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경미한 헌법 위반이나 단순한 정치적 불만으로 탄핵이 남용될 경우 헌정 질서와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 정치적 갈등이나 공직자의 실책은 먼저 정치적 논의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탄핵은 정치적 과정이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잦아지거나 남용될 경우 정치권의 자율성과 책임성이 훼손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제도적 자제이다. 제도적 자제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대화와 타협, 그리고 법치주의의 존중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이다. 따라서 탄핵 과정은 반드시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야 하며, 정치적 헌법적 정당성과 법적 중립성을 지키는 것이 탄핵 여부와 관계없이 민주주의의 신뢰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탄핵 민주주의’는 탄핵이 정당 간 대립이나 권력 투쟁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정치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국민의 정치적 분열을 가져온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갈등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는 시스템이지만 탄핵이 일상화되면 민주적 절차가 약화된다. 나아가 선거를 통해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정치적 도구로 박탈하려는 시도가 되어 선거 제도의 정당성을 훼손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국민은 정치 체계에 대한 신뢰를 잃고,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탄핵이 일상화될 때 당파성이 심화되고 탄핵 심판을 담당하는 헌법 기관도 당파성에 오염되어 사회 갈증을 더욱 심화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의 결과로 다시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할 오늘날 국민 모두가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다. 의아한 것은 이 글을 쓴 서평가는 아홉 번 연거푸 탄핵 심판을 기각당한 민주당 국회의원이라는 점이다. 찾아보니 이번 국회의원은 아니고 지난 21대 국회의원이었는데, 아마 이런 생각 때문에 이번 국회의원에서 빠진 게 아닌가 싶다.
이황희 교수는 서평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법을 정의로운 것으로 여긴다. 법이라는 글자에 포함된 물(水)은 공평함을 상징한다. 많은 서구 언어들에서도 법이라는 어휘는 올바름이나 정당함을 지시한다.”
나도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다가 몇 년 전인가, 재판은 밝혀진 증거로 판단하는 것이지 정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어떤 법률가의 주장에 아연실색한 일이 있다. 나는 재판과 법을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황희 교수의 주장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재판과 법은 무관한 것인가?
최근 삼권분립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권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책을 읽다 보니 그게 바로 나치 법률가들의 주장이었다.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였으나 힌덴부르크 사후에는 대통령의 지위까지 이어받아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 권한을 모두 거머쥔 총통이 되었다. 나치 법률가들은 총통에게 ‘형식적 합법성을 초월하고 법 위에 있는 정의 개념을 인정하는 리더십’을 부여했다. 그는 민족의 수탁자로서 ‘민족적 의미에서 정의와 결합’된 자였다. 여기서 입법ㆍ행정ㆍ사법이라는 전통적인 권력 분립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총통의 절대 권력’만이 의미를 가질 뿐이다. 나치 국가의 법은 이제 입법의 형식을 빌린 지도자의 정치적 의지일 뿐이며, 총통은 입법에 관해 모든 권한을 갖는다고 여겨졌다. 총통의 의지는 의회 다수파에 의해 제한될 수도 없고, 총통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법률은 사법 심사의 대상에서도 배제되었다.”
이번 호를 읽고 제시 싱어의 <사고는 없다>를 주문했다. 그 책에 대한 재난연구자 박상은의 서평 일부이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것은 시스템적 문제를 덜 보게 만든다. 보통 공식 조사는 누군가 잘못했다는 가정에서 시작하는데, 만약 조사가 사고를 둘러싼 환경이 문제였다는 가정에서 시작하면, 현 질서를 위협할 수도 있다. 따라서 권력자들은 특정인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사고 원인 프레임을 짠다. 저자는 책의 초반부터 줄곧 권력이 비난을 피해 피해자나 시스템의 말단에 있는 노동자에게 향하도록 한다고 비판한다.”
말미에 소설가 이만교의 에세이가 한편 실렸다. 저절로 읽게 만든 책이 좋은 책이라는 필자의 정의에 크게 공감했다.
“좋은 책은 내 의지로 읽는 게 아니다. 저절로 읽게 된다. 내 의지로 힘을 내어 억지로 읽는 독서는 금세 지친다. 읽고 싶은, 혹은 언젠가는 읽어야 할 좋은 책을 많이 구입해 두되, 펼쳐 읽다가 절로 집중이 안 되면 그냥 내팽개쳐 둔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읽을 수 있는 책 권수는 많지 않다. 만약 책 관련 직업이라면 만여 권 남짓을 읽고, 그렇지 못하면 천여 권쯤을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