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ege of MECCA
The Siege of MECCA
야로슬라브 트로피모프
앵커북스
2007년
사우디에서 십수 년의 주재원으로 근무하다 보니 사우디를 시장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나름 안목을 갖추게 되어 그것이 책을 쓰는 것까지 이어졌다. 그것까지야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사우디가 내게 시장인 것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사는 동안 이슬람으로 정의되는 사우디 문화도 접했고, 그러면서 사우디 역사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사우디 문화나 관습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역사를 하나둘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건 심심풀이로 써재낄 정도이지 어디 정식으로 내놓을 글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만 사우디 역사책을 쓰는 모양이 되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곳에 사는 동안 사우디 역사에 대해 써놓은 글이 있기는 하지만, 1932년에 세워진 지금의 사우디 왕국에 해당하는 3왕국의 현대사에 국한할 뿐이고 앞선 2왕국과 1왕국에 대해서는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정도 이상으로 아는 게 없었다. 책을 쓰기로 하고 2년이 가까워져 오는 동안 열심히 자료를 찾고 책을 읽었다. 국내에는 이에 관한 책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간혹 학술논문으로 발표된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사우디 전체 역사를 조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아무튼 알만한 분들에게 묻기도 하고 검색도 해서 관련 서적 몇 권을 찾았다. 아마존에 주문해 받아들기는 했는데, 원서로 읽는 게 어디 만만한 일인가. 그렇게 한 해 넘게 읽고 정리한 것으로 틀을 잡아볼까 하던 참에 컨설턴트로 사우디 정부 사업에 오래 간여한 친구 하나가 이야기 끝에 책 하나를 소개했다. <1979년 메카 대사원 점령 사건>을 다룬 책이었다.
그 사건이 사우디에 미친 영향을 익히 알고 있던 나로서는 도저히 그 이야기를 흘려버릴 수 없었다. 그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사우디 역사를 들여다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사우디 현대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우디 현대사에는 두 번의 큰 전환점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 하나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2017년 리츠칼튼 숙청 사건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이 왕세자에 오르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벌인 사건으로, 그는 이를 계기로 일거에 견제 세력을 무너뜨리고 실질적인 권력자에 올랐다. 이 사건을 사우디 역사의 전환점으로 여기는 건 내 개인적인 견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이슬람 종주국을 자임하며 고수해온 사우디의 이슬람 보수주의가 이를 기점으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1979년 이전의 사우디로 복귀한다는 선언이 자리 잡고 있다.
2017년 리츠칼튼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우디는 이슬람 종주국으로서 사회의 모든 기준이 이슬람의 가치에 맞춰져 있었다. 남녀가 유별해 모든 접객업소가 가족이 아닌 남녀 합석이 불가능했다. 여성은 운전할 수 없고, 취업도 불가능했고,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생활도 아버지나 오빠, 혹은 아들인 후견인의 승인이 필요했다. 극장도 없었고 공연도 불가능했다. 사우디에 사는 십수 년 동안 접객업소에서 음악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면 그때 왕세자가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1979년 이전의 사우디는 어떤 모습이었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이 되는 사건이 바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1979년 ‘메카 대사원 점령’ 사건이다. 사우디 정부는 메카 대사원을 점령한 극단적인 와하비즘을 추종하는 주하이만과 그 세력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해 결국 프랑스 특수부대를 끌어들여 이를 진압한다. 사우디가 이슬람 종주국을 자임하는 근간이 되는 성지인 대사원에서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이방인이 무슬림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1979년에는 중동에 격동이 일었다.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등장했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사우디에서는 주하이만이 메카 대사원을 점령했다. 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다. 이슬람 세계 내부에서 정체성 재구성으로 변화가 일어났고, 냉전을 벌이고 있던 강대국이 이에 반응하고, 그 결과로 중동 권력 구조가 재편된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 탈레반의 성장, 알카에다 등장, 9.11 테러 등으로 이어진다.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등장해 이슬람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슬람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면서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큰 영감을 준 것이다. 메카 점령 사건을 일으킨 주하이만은 사우디 왕가의 부패와 서방과의 결탁을 비판하며 순수 이슬람 질서의 회복을 주장했는데, 이는 호메이니의 반서방 반왕정 메시지와 유사한 성격을 띠었다. 말하자면 이란 혁명이 메카 점령 사건의 이념적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란 혁명은 미국에 치명적인 외교적 타격이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친서방 정권이 붕괴할 수 있다는 신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이슬람 세계의 격변이 자국 내 무슬림 소수민족과 중앙아시아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고, 이에 따라 인접한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정권이 붕괴되면 그 영향이 자신들에게까지 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특히 이란과 국경을 맞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주의 반란이 확산하면 공산 진영의 아킬레스건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소련은 급하게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단행한 것이다.
메카 점령 사건 이후, 사우디는 왕정 체제를 정당화하고 이슬람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에 양보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국내 급진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외부의 이슬람 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미국도 이슬람을 반공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우디와 협력해 무자헤딘을 무장화하고 훈련해 파견한다. 이처럼 메카 점령 사건은 사우디와 미국의 이슬람 활용 전략을 강화하고, 아프간 전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 책에서 물론 이런 주변 정황을 모두 담아내고는 있지만, 내가 궁금했던 건 당시에 일어난 사건 자체였다.
메카 점령 사건을 주도한 주하이만은 서방과 밀접한 사우드 왕가의 타락을 비판하며 메카를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면에 마흐디라고 주장하는 무함마드 압둘라를 내세운다. 마흐디란 이슬람 종말론에서 등장하는 ‘인류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는 구원자’로, 최후의 심판이 오기 전에 나타나 세상을 바로잡는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순한 종교 개념을 넘어 위기 시대에 ‘정의로운 질서’를 회복하려는 정치적 사회적 상상력으로 작동해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마흐디라고 믿어지는 무함마드 압둘라를 만나 자기 신념을 구체화한다. 당시 스물다섯에 불과했던 무함마드 압둘라는 반신반의하다가 주하이만의 확신하는 모습을 보고 주하이만이 요청한 대로 마흐디로서 점령 사건의 전면에 나선다. 주하이만은 무함마드 압둘라를 마흐디로 확신했을 뿐 아니라 깊이 신뢰해 아내와 이혼한 후 무함마드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기도 한다.
아무튼 이 책에서는 주하이만이 메카 사건을 일으키게 된 배경과 사건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소설 못지않은 긴박감이 있어 처음에는 하루 한 챕터 읽기도 바빴지만 사건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는 자는 시간을 줄여가면 하루 서너 챕터씩 읽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사우디는 오십 년 가까이 긴 암흑기에 들어가게 된다. 성지 메카에 군대를 투입하기 위해 종교 지도자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기도 했고, 그게 왕정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슬람 보수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TV에서 여성 아나운서가 퇴출되고 암묵적으로 용인하던 여성 고용에 대한 단속이 병행되었다. 사우디에서 활동하는 서구 기업들도 여성 인력을 해고해야 했다. 리야드 호텔의 한 유럽인 매니저는 여성 비서를 고용했다는 이유로 심문을 받았다. ‘권선징악위원회’라는 이름의 (건달이 대부분인) 종교경찰이 외국기관을 마음대로 습격할 수 있었다. 주하이만의 또 다른 표적이었던 술은 1980년 초부터 구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저명한 왕자들이 운영해오던 밀수 네트워크는 메카 사건 이후 사라졌다. 물론 왕족을 비롯한 고위층은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을 뿐 자유를 지나 방종을 누리는 건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고생한 건 서민 대중뿐이었다는 말이다.
2주 동안 계속된 이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구도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는 말이다. 사우디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망자는 270명에 지나지 않는다. 마흐디로서 점령 사건이 구심점이 되었던 무함마드 압둘라는 대사원 탈환 작전 중 피격되어 사망했고, 주하이만은 생포되어 60명이 넘는 부하들과 함께 1980년 1월 9일 사우디 8개 도시에서 공개적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이 책은 9.11 사건을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이 사우디 정부가 돕는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에 지원하는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사우디 현대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세 번째 사건이라면 아마 9.11 사건이 아닐까 싶은데, 그러고 보면 이 사건도 앞의 두 사건과 함께 모두 하나로 엮인 셈이다.
처음 사우디 역사를 주제로 책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못 한다고 했다. 생각과 달리 지금 이러고는 있는데, 이 년 가까이 매달리다 보니 이제는 책 쓴다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사우디 역사에 한 걸음씩 더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책으로 자료 수집은 마무리할까 싶기는 하다. 그런데 생각대로 마무리가 될지는 모르겠다. 이 책을 주문하다가 파이살 국왕의 일대기가 꽤 여러 권 발간된 걸 알게 되었다. 사우디가 국가로서 틀을 잡게 된 시기가 바로 파이살 국왕 재위 시절이었다. 우리로 말하자면 세종과 비견할 만한 인물인데, 지금은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세종을 빼고 조선사를 정리하겠다는 것 같은 찜찜함이 남아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