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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한국이란 무엇인가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27

by 박인식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스물일곱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으라>는 제목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한국이란 무엇인가>를 읽었습니다. <추석...>이 화제가 되었을 때 저 분이 언제 서울대로 옮겼나 싶었습니다. 그럴 이유가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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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어크로스

2025년 4월 10일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백 명씩 한데 모여서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어져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득의한 듯 희희 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김영민 교수가 1999년에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이다. 교회를 향해 쏟아낸 날 선 비판이었다. 2018년에는 경향신문에 실린 김영민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으라”는 칼럼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한겨레에 칼럼을 쓸 때만 해도 한일장신대 교수였던 그가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고 해서 몹시 놀랐다. 동명이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철학자이고, 동일인이라 여길 만큼 문체나 행간에서 풍기는 느낌이 너무 비슷했다. 공교롭게 두 사람이 쓴 책을 모두 몇 권씩 읽은 게 오히려 혼동을 부추겼던 모양이다.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신간 소식에 얼른 사기는 했는데, 처음 몇 장을 넘기면서 후회가 들었다. 그동안 검색해가며 읽었던 칼럼을 모아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읽은 걸 잊을 만큼 시간이 지난 글이 많아 새롭게 읽을 수도 있었지만, 저자 특유의 글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문체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어 다소 식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읽어가면서 어느샌가 그 방식과 문체에 빠져들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물으라는 칼럼은 개그의 소재로도 쓰였지만, 사실은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그렇게 만만하게 소비될 주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그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못생겼다고 평가할 때 잘생긴 구석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잘생겼다는 게 무엇이냐, 사람을 잘생겼나 못생겼나 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냐, 누가 너더러 그런 거 평가하라는 자격을 줬느냐”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얼핏 추석 칼럼이 떠오를 전개 방식이기는 하지만, 저자는 이 글에서 “학문적 자유란 선택지에서 고르는 게 아니라 선택지 자체를 내팽개치는 것”이라고 비로소 자기주장의 바탕을 설명한다.


저자는 보양식과 인문학 강연을 절묘하게 대비해 이면에 감춰진 실체를 끄집어낸다. “절제되고 균형 잡힌 섭생과 규칙적인 운동을 마다하고 보양식을 찾는 이들”과 “마음의 잔근육 단련을 통해 정교한 ‘생각의 힘’을 얻으려 하지 않고 몇 번의 인문학 강의로 대신하려는 이들”을 등치시켜 한국 정치가 왜 상대를 악마화하는 것으로 정치적 모멘텀을 얻으려 했는지 원인을 찾아낸다. 체계적인 의제 발굴이나 담론의 성숙을 이룰 여유도 없고, 그러다 보니 그럴 능력마저 없어졌다는 말이다. 결국 정치에서 상생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모두가 과로에 젖을 만큼 너무도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니, 또 다른 김영민 교수가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허망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 면에서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의 주역들이 조롱과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절제되고 균형 잡힌 섭생과 규칙적인 운동이 아닌 보양식으로 건강을 유지했으니 한번 ‘가두시위’로 소진한 힘을 충전해 ‘가두시위의 정신’을 유지해나갈 여력이 없었을 것이고, 마음의 잔근육을 단련해 정교한 생각의 힘을 얻는 대신 몇 번의 인문학 강의로 소양을 쌓았을 뿐이니 혁명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처럼 주체적 시민으로서의 기초를 갖추지 못한 결과가 그들이 밀어낸 군사 정권의 자리를 민간인 교주가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랬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혁명을 완수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만큼 큰 보상과 관심을 당연하게 여기고, 시민단체에서 정치권으로 옮겨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당연한 자기 몫으로 여긴다. 그런 이들에게 시민단체의 목표가 비판과 견제라는 것을 깨우쳐준들 그들이 귓등으로나 듣겠는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당연한 보상으로 여기는 것으로 그치면 돌아서서 한번 흉이나 보고 말일이다. 저자는 그런데도 그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자신이 비판과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여전히 도덕적 잣대가 자신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고 일갈한다.


내가 그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게 바로 이 점이다. 자신이 나쁜 놈이라는 걸 인정하는 나쁜 놈은 침 한 번 뱉고 돌아서면 그뿐이다. 나쁜 놈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인간들이 남들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꼴은 그들을 증오하게 만든다. 그들은 정녕 그걸 모른다는 말인가. 그래서 춘향전은 암행어사 출두로 끝맺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의 죽음으로 끝맺게 했을 거라는 저자의 추측에 공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만, 가두시위가 끝난 그 어간 어디에서 시간이 멈췄더라면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이다.


저자가 <어른 김장하>에 대해 쓴 글이 있는 걸 보고 호기심이 일었다. 호평이 줄을 잇는 데도 그다지 볼 마음이 들지 않아 미뤄두었다가 최근에야 보게 되었다. 그런 유형의 프로그램이 대체로 미화와 윤색으로 덧칠하게 마련인데, 유독 그런 걸 편히 보지 못하는 내 까다로운 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인물을 생각보다는 훨씬 담담하게, 크게 꾸미지 않고 그려낸 모처럼 만나는 수작이었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저자에게는 어떻게 비쳤는지 더욱 궁금했다.


“김장하는 현실 정치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직업적 정치인이 아니어도 공적 관심을 유지하고 사리사욕이 아닌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시민사회의 핵심이다.”


저자는 김장하를 바라본 소회라고 쓴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것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저자의 메시지로 들렸다. 한국 정치 어디에도 희망을 걸어볼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정치에 무관심한 데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그러니 그럴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라는, 그렇게 해서 희망의 불씨를 살려보자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그를 취재한 김주완 기자에 대한 설명이었다.


“<어른 김장하>는 김장하에 관한 이야기만큼이나 그를 취재한 김주완 기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그동안 기득권자의 비리와 악행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기사를 주로 써왔다. 그러나 그런 방식을 통해서는 이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 그토록 폭로하고 비판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비리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퇴를 맞은 그는 나쁜 사례를 폭로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좋은 사례를 발굴하고 선양하기로 결심한다.”


기득권자의 비리와 악행을 고발하는 기자들의 노고에 비해 그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하다. 고발 기사에 분노하고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분노를 터트려 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경험이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이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이지 그를 타개하기 위해 뭔가 다른 방법을 모색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다고 뭔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일에 내 시간을 쓰는 게 낭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상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아도 휘청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건, 얼마큼 걷고 나서 돌아보면 그래도 아주 조금은 세상이 나아져 가는 건 냉랭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끊임없이 비리와 악행을 고발하는 것으로 세상을 고쳐보려는 이들, 좋은 사례를 발굴하고 선양하는 것으로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는 이들 때문이 아닐까.


관객 모두 그 영화를 보면서 김장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이에 저자는 그 영화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근원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사지선다형 문제의 선택지에 묶여 그중에서 답을 고를 생각을 버리고 선택지를 거부하는 게 학문의 출발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그래서 철학을 학문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뜬금없이 동명이인인 다른 김영민 교수로 글을 시작했다. 두 김영민 교수 모두 철학자로서 독자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을 깨우쳐주는 데 힘쓰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세상을 바라본 결과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철학의 범주로 분류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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