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라는 가요가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노래이다. 나는 이런 문화적인 도구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이처럼 굳이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꼭 기독교 신앙을 말하는 건 아니다. 나뭇잎으로 바람을 나타내듯 대상을 드러내지 않고 대상을 표현하는 게 은근하면서도 오히려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꼭 그런 영화를 하나 보게 되었다. 잠깐잠깐 스쳐 가듯 내용을 알게 된 영화인데,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눈에 들어와 두 시간 가까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건너뛰지 않고 봤다. (압축 영상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참 드문 경우이기는 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담장을 함께 쓰는 사택에서 살아가는 소장 일가의 일상을 통해 수용소를 표현한 영화로, 수용소는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본 것보다 더 생생히 참상을 전한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너무 오남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보이더라만, 이 영화에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관용구가 있을까 싶다.
수용소 소장 일가는 수용소 담장 너머로 들리는 유대인의 말소리와 유대인을 태우는 연기와 화염을 마치 배경음악이자 무대장치 정도로 여기고 일상을 이어간다. 죄의식은 물론 아무런 느낌도 없다. 마치 두 세계는 담장 하나로 온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수용소에서 걷어온 쓸만한 물건에 희희낙락하고, 수감자를 하인으로 부리고, 그러다 잠깐 실수한 여성 수감자를 보고 남편에게 말해 너 하나 태워버리는 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하지만 딸네 집에 와서 잘 갖춰놓고 사는 딸의 집을 둘러보며 몹시 뿌듯해하던 소장의 장모는 굴뚝으로 나오는 연기와 불꽃을 보고는 말도 없이 밤사이 떠난다.
우리의 삶이 수용소 소장 일가와 다를까? 다르다면 얼마나 다를까? 누군가의 땀과 희생과 고통을 밟고 사는 건 아닐까? 그런 걸 모르는 것인가, 모르는 척하고 사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사는가?
‘가시나무’는 기독교 신앙고백으로 만든 노래이지만 그걸 아는 이는 별로 없고 그저 가요로 기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가시나무’를 그저 가요로 흘려듣다가 어느 날 문득 그 가사의 본뜻을 떠올리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처럼, 일상을 누리는 중에 우리 삶이 누군가의 땀과 희생과 고통을 밟고 선 것이라는 걸 문득 떠올리기라도 하면 좋겠다. 변화는 그런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니 말이다.
아래는 위키백과에 실린 영화 줄거리이다. 줄거리 다 알고 보면 오히려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망설이지 말고 읽어보시고, 망설이지 말고 감상하시라. 넷플릭스에도 있고 티빙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말 제목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이다. 상영시간 1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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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는 아내 헤트비히, 다섯 자녀와 함께 수용소 담장에 붙어 있는 잘 가꾸어 놓은 사택에서 살고 있다. 회스는 아이들과 수영과 낚시를 즐기고, 헤트비히는 정원을 가꾸며 시간을 보낸다. 유대인이 아닌 수감자들이 집안일을 하고, 살해된 유대인들의 소지품은 이들 가족에게 주어진다. 집 밖에서는 총소리, 비명, 기차와 화장로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회스는 토프 앤 손스가 설계한 새로운 화장터를 승인한다. 어느 날, 그는 강에서 사람의 유해를 발견하고 아이들을 물에서 나오게 한다. 그는 SS 요원들에게 “라일락을 따다가 식물에서 피가 나게 했다”며 부주의함을 질책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밤에 회스가 딸들에게 ‘헨젤과 그레텔’ 동화를 읽어주는 동안, 폴란드 소녀는 몰래 빠져나와 수감자들의 작업장에 음식을 숨겨둔다.
헤트비히의 어머니가 방문해 딸이 누리고 사는 것에 감탄한다. 회스는 수용소 부감찰관으로 승진해 베를린 근처 오라니엔부르크로 이사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이 결정을 헤트비히에게 며칠 동안 소식을 숨긴다. 헤트비히는 회스에게 자신과 아이들이 집에 머무를 수 있도록 상사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하고, 회스는 상사의 허락을 얻는다. 회스가 떠나기 전, 한 여자가 그의 사무실에 찾아와 섹스할 준비를 한다. 한편, 폴란드 소녀는 수감자가 작곡한 악보를 발견하고 집에서 피아노로 연주한다. 헤트비히의 어머니는 밤에 화장터에서 불타는 냄새와 연기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떠나며, 헤트비히는 하인들에게 화를 내고 위협한다.
베를린에서 회스는 오스발트 폴에게 그의 이름을 딴 작전(헝가리 유대인 70만 명을 수용소로 이송하여 노동시키거나 처형하는 작전)을 맡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아우슈비츠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할 수 있게 된다. 그는 SS 경제 관리국이 주최한 파티에 멍하니 참석한다. 파티가 끝난 후, 그는 헤트비히에게 파티 참석자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스실에 넣는 방법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전화로 말한다.
회스가 베를린 사무실을 떠나 계단을 내려가던 중, 갑자기 구역질하며 건물 복도의 어둠 속을 응시한다. 현재 시점으로 전환된 장면에서 청소부들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을 청소한다. 영화는 다시 1944년으로 돌아가고, 회스는 계속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